대통령실 질타에 재판중지법 제동…"APEC 성과에 찬물"

이재명 대통령이 2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의 형사재판을 중지하는 '재판중지법' 처리를 공식화한 지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꿨다. 이재명 대통령을 정쟁으로 끌어들이지 말라는 대통령실의 요청이 있는 데다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성과가 주목받아야 할 때라는 당내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다.

재판중지법을 충분한 숙의 없이 강경파에 이끌려 무리하게 추진하려다 야당에게 이 대통령 사법리스크를 정쟁으로 활용할 빌미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혹평도 내부에서 나온다.

강훈식 "대통령, 정쟁 끌어들이지 말라"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3일 "민주당은 정청래 대표 등 당 지도부 간담회를 통해 국정안정법(재판중지법)을 추진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국정감사 이후 최우선 과제로 재판중지법 처리를 공식화한 지 하루 만이다. 박 수석대변인은 지난 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미 법사위를 통과해 국회 본회의를 기다리고 있는 법왜곡죄와 국정안정법을 최우선 처리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을 원론적 입장이지만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밝혔었다.

재판중지법 처리에 제동을 걸고 나선 건 대통령실이었다. 대통령의 형사재판이 여야 간 정쟁 소재로 소비되면서, 정부의 경제∙외교 성과보다 이 대통령의 사법리스크가 더 크게 부각되는 상황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 강훈식 비서실장은 이날 예고에 없던 브리핑을 자처해 "당에 사법개혁안 처리대상에서 재판중지법을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께서 더 이상 정쟁에 끌어들이지 말고, 민생과 경제를 살리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며 이례적으로 '해석'까지 붙였다. '요청'의 대상은 여당 지도부로 풀이된다.

이렇게 하루 만에 입장이 번복된 데 대해 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실과 어느 정도 조율은 있었겠지만, 주말에 APEC 일정으로 바빴다 보니 문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귀띔했다.

APEC 성과 가릴라…與, 급하게 입장 선회

재판중지법 문제로 정국이 소란해지면서 성황리에 마무리된 경주 APEC 정상회의 성과를 가렸다는 점도 입장 선회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열렸던 대통령실 비공개 정례 회의에서도 그런 점에 대한 질타가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여권 관계자는 "당이 APEC 기간엔 논란을 만들지 않기로 했는데 최민희 국회 과방위원장 축의금 문제가 커지면서 모두가 곤란했던 상황"이라며 "그런 마당에 재판중지법 관련 메시지가 세게 나오면서 APEC 성과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을까 걱정됐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박홍근 의원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매우 성공적으로 치른 경주 APEC의 국가적 에너지가 자칫 불필요한 정쟁으로 소진될 뻔했는데 조기에 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재판중지법' 추진할수록 불거진 '사법리스크'

민주당이 재판중지법 처리를 공식화할수록 국민의힘이 이 대통령 사법리스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중지법을 두고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군불을 때니 민주당이 끓지 않을 수 없다(박수현 수석대변인)"는 식으로 비난의 화살을 국민의힘 쪽으로 돌리는 게 민주당의 당초 전략이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고 판단했다는 해석이다.

한 민주당 의원은 "(재판중지법은) 국민의힘 측에서 정치적 이슈로 끌고 가니까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법사위 소속 일부 의원들이 추진한 것"이라면서도 "법원에서 헌법 정신에 따라 재판을 중지하고 있는데 우리가 굳이 정치적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강경파의 재판중지법 추진…혼란만 키웠나

애초 헌법 해석상 법원이 재판을 재개할 가능성이 극히 떨어지는데도, 강경파가 관련 논의를 주도하면서 혼란만 키운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헌법 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정하고 있다. 헌법학계에서는 소추는 기소와 기소 후 공소유지를 포함한다는 게 다수설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만큼 법무부 등에서 민주당의 '재판중지법' 추진에 대해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의 뜻을 거듭 표했지만, 민주당 소속 법사위원들은 대법원의 이 대통령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 파기환송 결정 후 6일 만에 재판중지법을 통과시켰다.

여당 초선 의원은 "대통령실에서 제동을 건 것은 APEC으로 분위기가 좋으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메시지로 읽힌다"며 "강경파들이 일을 키웠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당내 대체적 기류는 이들에 대해 '잘한다, 잘한다' 하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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