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구가 혈세 수억 원을 들여 조성한 한지체험관이 간판만 남을 처지에 놓였다.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행정복지센터로 쓴다는 계획인데, '도시재생'이라는 사업 목적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 서구 동대신2동 골목길 끝자락에 있는 '닥밭골 한지체험관'은 외견상 새 건물이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해까지 한지 명인이 공예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작품도 전시했지만 현재는 빈 공간으로 방치돼 있다.
닥밭골 한지체험관은 지난 2020년 11월 도시재생사업 '닥밭골, 새바람'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체험관을 통해 주민 교류를 확대하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도시재생을 추구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런 명목으로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공모 사업에 선정됐고, 지원받은 국비 5억 6천만 원에 시비 2억 8천만 원을 더해 모두 8억 6천만 원을 들여 지었다.
그러나 체험관 운영은 파행을 거듭했다. 서구는 민간 위탁 운영자를 공모했지만, 두 차례 유찰되면서 1년 넘게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됐다. 한지 원료로 쓰이는 닥나무가 많았다는 마을 기원에 착안해 한지체험관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닥나무도 거의 없고 지역에 한지 장인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지역에 있는 닥종이 공예 명인을 사업자로 선정했다. 2022년부터 한지 체험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면서 목적에 맞게 운영되는 듯했다. 그러나 서구는 불과 3년 만에 운영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위탁 계약이 끝나는 지난해 11월 명인에게 퇴거를 통보했다. 수익금 10%를 지역 공헌에 쓰기로 했으나 3년 내내 적자를 기록해 지역에 돌아오는 돈이 없었고, 주민 교류 확대 효과도 미미하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후 체험관은 또다시 빈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다.
한지체험관에서 공예 명인을 내보낸 서구는 돌연 체험관을 행정복지센터로 쓰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2층 건물을 3층으로 증축해 1~2층은 행정복지센터로 쓰고, 3층에 기존 한지체험관을 이전하겠다는 계획이다. 준공 목표 2027년, 예산 16억 원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다. 계획대로 증축을 진행할 경우 3층으로 이전하는 한지체험관 면적은 기존보다 절반 가량으로 줄어든다.
이를 두고 지역에서는 구청이 사업 목적인 '도시재생'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채 건물을 다른 용도로 쓰려고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부산 서구의회 황정재 의원은 "정부 공모 사업으로 예산을 받아 조성한 만큼, 목적에 맞게 사업을 활성화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 방안도 없이 체험관을 방치하다가 증축해서 행정복지센터로 사용하겠다는 건 본래 목적에 맞지 않고, 사실상 편법"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구는 한지체험관 기능을 유지하는 만큼 사용 목적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입장이다. 부산 서구 관계자는 "오래된 행정복지센터를 이전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고, 찾다 보니 한지체험관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신축하는 것보다 예산도 절감할 수 있다"며 "국토교통부와 협의할 예정이지만 한지체험관도 함께 운영할 계획이어서 크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국비를 투입한 시설을 임의로 축소해선 안 된다며 선을 그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국비가 투입된 부분의 사업 용도가 실제로 유지되는지에 대해서는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 다만 체험관이 기존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경된다면 승인하겠으나, 체험관 규모가 기존보다 축소되거나 환경이 더 열악해지면 승인할 수 없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