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 제주지역 사회적기업인 일배움터가 지난달 30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7회 장애인 직업 재활의 날 기념식'에서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20년동안 한결같이 중증장애인들의 일자리를 위해 힘써온 일배움터의 오영순 원장 스튜디오에 모시고 얘기 나눠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받으신 소감이 어떠세요?
◆오영순> 올해가 일배움터 20주년인데요. 20년을 함께해온 청년장애인들과의 여정에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박혜진> 일배움터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원장님께 20년이라는 시간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오영순> 지난 20년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고, 머뭇거리다가 다시 시작했던 시간들도 많았습니다. 저에게는 함께 자라온, 숲처럼 단단해진 시간이었고 청년장애인과 가족, 동료, 지역사회가 서로 연대하며 함께 걸어온 것 같습니다.
◇박혜진> 창립 초기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일배움터가 가장 많이 변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영순> 2007년, 중증장애인 사원 22명으로 출발했던 일배움터는 2025년 현재, 전체 구성원 64명 중 72%가 중증장애인 사원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무엇을 할까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누가하면 좋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합니다. 즉, 기존 사업에 사람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에 일을 맞추는 새로운 일자리 모델로 전환했습니다.
◇박혜진>'사람에 일을 맞춘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실제 현장에서 이를 어떻게 실천하고 계신지 구체적인 사례도 듣고 싶습니다.
◆오영순> 대표적인게 올해 신설된 굿즈디자인팀이에요. 훈련생으로 있던 발달장애인 6명을 계속 훈련으로 가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이미 하고있는 꽃과 커피사업에서는 더 이상의 고용은 어려운 상황이였습니다.
훈련생들이 "꽃이 피었어요", "이거 내가 만들었어요", "취업하고 싶어요". 이 말들이 참 무겁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참 많은 고민을 하면서 생각의 틀을 바꿔서 사람에게 일을 맞춰보자 했고 장애인들의 그림 그리는 강점에 주목했습니다.
그저 취미로 여겨졌던 그림이 현실적인 일자리 모델로 구체화 되었던 사례입니다. 그림에 재능 있는 사원은 디자인팀으로, 꼼꼼한 분은 커피볶는 커피사업팀으로, 커피를 좋아하고 서비스업에 맞는 사원은 카페직무로, 활동적이고 식물을 다루며 안정감을 얻는 분은 원예팀으로 직무 배치하고 있습니다.
일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장애인 사원 개개인의 강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박혜진> 지속적으로 성장을 가능하게 한 일배움터만의 운영 원칙이나 철학은 무엇인가요?
◆오영순> 일배움터의 가치와 철학은 청년장애인들이 남들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청년장애인이 직장을 가진다는 건 그만큼 누구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는 뜻입니다.
일배움터는 장애인 직원들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맞춤교육을 통해 강점을 키워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빨리, 누구는 천천히 적응했지만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며 함께 걸어왔습니다. 우리는 속도보다는 방향을, 이익보다 가치를 우선하며 성장해왔던 것 같습니다.
◇박혜진>'출근이 즐거운 일터'를 만들기 위해 어떤 제도나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오영순> 서로를 존중하는 조직문화를 만들고 동료 간의 협력과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직원 복지로는 5년 이상 근속한 직원에게 해외연수 기회를 드리고 있고, 생일을 함께 축하하며, 근로자 휴가지원사업에도 참여하면서 직장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제주에서 '노동존중문화조성 우수기업 1호'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기 싫은 곳이 아니라 만나고픈 동료가 있는 곳, 그게 바로, 출근이 즐거운 일배움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혜진> 최근 굿즈디자인팀 신설, 스페셜티 커피 세트 출시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의 배경과 성과는 어떠한가요?
◆오영순> 굿즈디자인팀과 스페셜티 커피 세트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장애인 사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각자의 재능을 살리면서도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왔습니다.
기존처럼 정해진 사업 안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나 손재주가 있는 분들을 모아 상품 디자인과 굿즈 제작을 하는 '굿즈디자인팀'을 만들었습니다.
굿즈디자인팀 사원들이 만든 그림은 이번에 출시한 '플로베 스페셜티 커피 세트' 패키지 디자인에도 활용됐습니다. 스페셜티 세트는 에티오피아, 케냐,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디카페인 등 네 가지 원두로 구성된 한정판 제품으로 고객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춘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굿즈디자인팀은 사람의 재능을 일자리로 만든 새로운 시작이고, 스페셜티 커피는 그 재능이 실제 제품으로 이어진 첫 결실이였습니다.
◇박혜진> 일배움터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업 간 균형과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나요?
◆오영순> 분야는 다르지만, 운영의 기준은 같습니다. 바로 '사람 중심', '지속 가능한 일자리'입니다. 각 사업은 단순한 수익사업이 아니라, 우리 장애인 사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커피사업은 품질로 신뢰를 쌓아가고 있고, 원예사업은 돌봄과 치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굿즈디자인팀은 공공 및 다양한 전문 영역과의 협업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갈 계획입니다. 최근 트렌드가 K-굿즈라면, 우리는 앞으로 제주만의 스토리와 발달장애인 작가들의 개성 있는 디자인이 담긴 'J-굿즈'를 만들어 일배움터 만의 지속가능성을 이어 가고자 합니다.
◇박혜진>'급여 끝전 모으기'처럼 직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사회공헌 활동도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자발적 참여 문화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영순> 저희는 사회적기업으로서 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우선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장애인 사원들이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사회공헌활동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매우 높았습니다.
휴일에 부모님과 함께 자원봉사도 다니고 있었으니까요. 이들과 함께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공헌을 시작했고, 2020년에 발달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봉사동아리 '플로베를 배달하는 청년들'을 창립했습니다.
매월 4·3 후유장애 어르신 가정을 방문해 반려식물을 나누고 있고, 버려지는 폐화분을 재활용하는 '내 화분을 부탁해' 캠페인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인 직원들까지 '급여 끝전 모으기' 운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도움이 필요한 곳을 후원하며 활동의 폭을 넓혀왔습니다.
올해는 제주시와 업무협약을 맺고, 무연고 사망자분들께 근조 꽃바구니를 전달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 위로하는 활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박혜진> 사회적농업 '플로팜'을 통해 발달장애인 청년들이 직업을 얻는 성과를 거두셨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오영순> 사회적농업 '플로팜'은 발달장애인 청년들이 식물을 돌보며 배우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사회적농업을 기반으로 중증장애인 돌봄사업을 운영해오면서, 느낀 변화는 '장애인들이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봄의 주체로' 성장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꽃을 가꾸고 식물을 돌보는 과정에서 청년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기도 했어요.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일을 할까' 이야기 나누며 웃는 얼굴로 농장으로 향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함께 일하며 책임을 배우는 것', 그리고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립의 힘을 키워가는 것'이었습니다. 식물을 심고, 커피를 배우고, 목공이나 드로잉을 통해 재능을 발견한 그 노력들이 결국 '취업'이라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박혜진> 오랜 기간 중증장애인 직업재활에 힘써오시며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오영순> 무엇보다 보람을 느낄 때는 장애인 사원들이 단순히 출근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을 통해 성장하고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원은 주말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예전에 자신이 심은 꽃이 피어 있는 걸 보고 사진을 찍어와서 '이거 내가 심은 거예요' 하며 동료들에게 자랑하더라고요.
또 한 분은 대인관계가 어려워서 처음엔 적응이 쉽지 않았는데, 온실에서 식물에 물주는 일을 맡으면서 책임감이 생겼어요. 몸이 아파서 출근 못할 때는 '내가 물을 안 줘서 식물이 죽을까봐 걱정된다'며 아파도 출근하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성과를 낸 직원들도 많습니다. 플로베의 고민수 바리스타는 전국장애인바리스타대회에서 우승했고, 용준 씨는 장애극복상으로 장관상을 받았습니다.
또 강승호, 왕희령, 윤준혁 사원도 여러 기관에서 표창을 받았어요.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런 변화와 성장이 일배움터의 진짜 성과이고 제게는 큰 보람입니다.
◇박혜진> 반대로, 운영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나 고민이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어떤 점이었는지요?
◆오영순>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아무래도 코로나19 때였습니다. 그 시기에는 저희 사회적기업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경제 상황이 정말 힘들었죠. 당시 저희 플로베카페가 롯데면세점 4층에 있었는데, 주로 중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하늘길이 막히면서 손님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그때 10명의 바리스타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도록 일배움터 꽃농장이나 플로베의 다른 매장으로 근무를 조정했어요. 서로 일을 나누면서 버텼던 시기였죠.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함께 일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느꼈던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박혜진> 향후 5년, 혹은 10년 뒤 일배움터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기를 바라시나요?
◆오영순> 앞으로 5년, 10년 뒤에도 일배움터가 여전히 청년장애인들이 즐겁게 출근할 수 있는 일터였으면 합니다. 일이 부담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하루'가 되는 그런 직장 말이에요. 그리고 저희가 운영하는 굿즈 브랜드 'J-굿즈'가 더 성장해서 매출도 늘고, 그만큼 더 많은 장애인 직원들을 채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혜진> 장애인 고용과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역사회나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영순>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일반 기업과 비교했을 때 자본력이나 브랜드 인지도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장애인 생산품을 만들어도 소비자에게 다가갈 기회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부와 지역사회가 장애인 제품과 사회적기업 제품이 소비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판로와 마케팅 지원을 확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박혜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오영순> 사회적기업과 장애인 생산품에 대한 관심이 '착한 소비'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도민 여러분이 장애인바리스타카페 플로베를 찾아주시고, 플로베 유기농 커피나 청년 장애인 원예가들이 키운 꽃을 구매해주시는 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청년 발달장애인들의 일자리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일배움터도 고객이 믿고 선택할 수 있도록 상품의 품질과 서비스를 꾸준히 높여가겠습니다. 앞으로도 청년장애인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오래오래, 건강하게 다닐 수 있는 '출근이 즐거운 일배움터'를 만들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