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이 발전할수록 질병은 더 정확히 발견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진단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과잉 판정 논란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신경과 전문의 수잰 오설리번의 신간 '진단의 시대'는 바로 이 지점을 깊이 들여다본다.
ADHD, 자폐 스펙트럼, 암 유전자 진단, 만성 코로나 증후군 등 최근 가파르게 늘어난 '현대적 질환들'을 분석하며, 우리가 진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다시 묻는 책이다.
오설리번은 30년 넘게 환자를 진료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 의료 환경이 '너무 많은 진단'으로 기울고 있다고 지적한다. 각종 검사의 민감도는 높아졌지만, 그만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흐려졌고, 유전자·뇌·면역 관련 검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불안과 부담을 안기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다양한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진단의 복잡한 얼굴을 보여준다. 헌팅턴병 가족력이 있어 검사를 망설이는 딸, 검사 기준의 회색지대에서 의료기관을 전전하는 라임병 환자, 중증 자폐 아들을 위한 지원이 경증 중심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어려워진다는 부모의 고민, 암 유전자 변이를 알게 된 뒤 정보 부족 속에서 수술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등. 각 사례는 "진단은 과연 누구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설리번은 진단이 종종 '객관적 과학'이 아니라 경험과 합의에 기반한 임상적 판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당뇨병 전 단계의 혈당 기준처럼, 수치 하나가 바뀌면 하루아침에 수백만 명이 '질병군'에 편입되는 현실을 짚으며, 진단이 때때로 불필요한 치료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도 제기한다.
또한 자폐, ADHD, 신경다양성 등 정신건강 진단이 빠르게 늘어난 배경을 분석하며, 진단이 정체성·커뮤니티·보상 구조와 결합하면서 생기는 새로운 도전도 함께 다룬다. 첨단 유전 진단이 아이·태아에게까지 확장되는 흐름 또한 윤리적·사회적 질문을 남긴다.
책의 말미에 소개되는 마지막 환자는 이미 여러 진단을 받은 젊은 사람이다. 오설리번은 기존 진단을 거둬들이기는커녕 새로운 진단을 하나 더 붙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현대 의료가 빠져 있는 '집단적 강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진단의 시대'는 의학을 불신하자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의학이 더 나은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성찰, 환자가 진단을 건강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조건, 사회가 갖추어야 할 안전망을 함께 모색한다.
수잰 오설리번 지음 | 이한음 옮김 | 까치 | 3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