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원로 배우 이순재는 남다른 연기 열정과 소신을 지닌 배우로 꼽힌다. 그는 정극과 시트콤, 영화, 공연, 예능을 두루 아우르며 구순을 맞은 지난해까지도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대중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자, '연기'라는 본업을 지닌 배우로서 자세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 출연, 과감한 연기 변신도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이순재는 1960년 KBS 1기 탤런트로 뽑힌 후 활발히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2009년 3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출연 당시, 이순재는 그동안 몇 작품이나 했는지 기억하느냐는 물음에 "작품을 기억할 수가 없다"라며 "(19)65년도까지 생방송을 했다"라고 털어놨다.
연기로는 이론이 없을 만큼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 이순재. 2007년 8월 MBC 사극 '이산' 제작발표회 당시 이병훈 PD는 출연진 중 카리스마 있는 제왕 영조 역 이순재를 제일 먼저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대본이 나오기도 한참 전인 2006년 9월부터 제안했다는 후문이다.
이 PD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연기력과 대사 전달력, 무엇보다 낮게 내리깔리면서도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가 압권인 분"이라며 "영조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다. 이순재씨말고는 달리 대안을 찾을 길이 없었다"라며 "영조가 확실하게 정해져야 정조도 그 색깔과 톤을 맞출 수 있다"라
고 답했다.
근엄하고 선 굵은 역할을 주로 맡았던 그는 2006년 1월 김병욱 PD의 새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잘 삐치고 칭찬에 약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한방병원 원장 이순재 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코믹 연기에 본격 도전한 이 작품으로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이순재는 2007년 2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이슈와 사람'에 출연해 "마음속에 남아있던 동심을 꺼내 연기했다. 나이가 일흔이든 여든이든 누구에게나 동심은 있다"라고 말했다.
70대에 시트콤을 도전했을 때 어떤 준비를 했는지 묻자 "남녀노소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속에는 공통된 심리가 있다. 그 부분을 꺼내어 연기하면 보는 이들이 동질감을 느끼고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온다고 믿는다"라며 '공감'을 바탕에 두고 연기했다고 답했다.
2009년 3월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시트콤'이라는 장르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순재는 '하이킥' 시리즈를 연기할 때 "정적인 작업이 아니라 동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꾸 뛰고 올라가고. 또 야외 촬영도 주로 뛰는 장면들이 많고"라며 "어려웠다"라고 하면서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시트콤이 재미있는 장르"라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배역은 '대원군', 해 보고 싶은 배역 '햄릿'
데뷔 62주년이었던 지난 2018년 영화 '덕구' 개봉 당시 열린 라운드 인터뷰에서는 그동안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사극 '풍운'의 대원군 역을 들었다. 그는 "보통은 대원군을 큰 사람이 했다, 정치적인 스케일 때문에. 원래 단구(체구가 작은)였다. 그런데 인생 역정은 참 복잡한 사람"이라며 "제대로 해야겠다 싶었다. 그때 담배도 끊어버렸다"라고 설명했다.
키가 작아서 배역에 제한이 많았고, 데뷔 초부터 노인 역할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은 이순재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고 싶은 역으로 '햄릿'을 꼽았다. 이순재는 "햄릿은 선망의 역할인데 타이밍을 놓쳤다. 키도 작고 노역만 하다 보니 나만 못 해 봤다고. 만약 했다면 해석을 달리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남들이 못했던 것 중에 시라노 역할은 했다"고 말했다.
영화 쪽으로는 해 보고 싶은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영화는 뭐 안 해 본 장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라고 반문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나서는 "아, 귀신 나오는 공포 영화, 액션 영화는 안 해 본 것 같다. 거지 역할도 안 해 봤다"고 답했다.
끊임없는 '노력'이 만든 연기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을 만큼 공부로도 좋은 성취를 그는 아버지의 응원이 마음 놓고 배우를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전했다. 2012년 5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를 "조언자고 격려자"였다고 기억했다.
차마 부모님께 돈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몰래' 연기를 시작했는데, "이거 꼭 해야 되겠느냐?"라며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에게 "이제 길이 없다. 최선을 다해서 할 때까지 해 보는 수밖에 없다"라고 답했다.
다행히 이순재의 아버지는 "앞으로의 세상은 뭐든 일류가 되면 밥은 먹지 않겠느냐.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라"라고 격려했고 용돈까지 주고 갔다고. 이순재는 이 일을 두고 "마음 놓고 여기(연기)에 정진하게 된 중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배우라는 직업을 못마땅해하며 경제적 불안정과 절제하지 못하는 생활을 우려한 맞선 상대에게 본인의 '배우론'을 펼친 일화도 있다. 2007년 3월 CBS라디오 '굿뉴스 투데이'에 출연한 이순재는 "이 분야에서 일류가 되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고, 언젠가는 우리도 할리우드 배우들처럼 잘 살 수 있는 시절이 올 것"이라고 반박했다고 전했다.
누구보다 기본기를 중시하기도 했다. 김수현 작가의 '그래 그런거야' 제작발표회가 열린 2016년 2월, 이순재는 "연기한 지 60년이 됐지만 지금도 촬영 들어가기 전에 리허설하면서 상대 배우와 대사를 맞춘다. 연기는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대사 톤이 맞아야 호흡과 앙상블이 좋아지기 때문"이며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연기 경험이 풍부한 선배들을 잘 활용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순재는 "연습하다가 잘 안되면 선배들에게 물어봐라. 선배들의 한마디를 귀담아듣고, 참고서 삼으면 보탬이 될 것"이라며 "신인 시절 연기에 서툴렀던 장미희, 유지인, 정윤희도 선배들의 집중적인 가르침 덕에 연기력이 향상되고 스타가 됐다"라고 전했다.
2021년에는 연극 '리어왕' 23회 차 전 공연을 원 캐스트(단일 배우)로 책임졌다. 그 바탕에는 끝없는 노력이 있었다. 제작발표회 당시, 이순재는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8시간씩 연습한다고 밝힌 후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 자기 전에도 대사를 한 대목씩 해 본다"라고 부연했다. 이어 "배우의 생명력은 현장에서 나온다. 공연을 완주할 수 있도록 보약 먹으면서 건강 관리를 한다"라고 말했다.
2018년 3월 영화 '덕구' 라운드 인터뷰 때는 '꾸준히 역량을 쌓은 중장년 배우들의 가치'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50~60대 연기자들도 좋은 사람이 많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연기의 스탠더드(기본)이 돼 있는 사람들이다. 50년 이상 수백 명의 남녀 주인공들이 번쩍거리다 사라졌다. 착실하게 역량 쌓은 사람들이 남은 것"이라고 밝혔다.
"'아, 이 정도면 나는 최고의 배우다. 이만하면 내가 대한민국의 최고지' 하는 자의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을 바깥에 가지고 나오면 안 돼요. 방구석에서 생각해야지. 연기에는 완성이 없어요, 끝이 없고. 어느 수준으로 잘할 수는 있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 얼마든지 높은 경지가 있다는 거예요.
세상엔 반드시 필요한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교훈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분야도 마찬가집니다. 작품보다 잘하는 사람, 작품만큼 하는 사람, 작품보다 못하는 사람. 배우는 작품보다 잘하는 경지로 가야 자기 연기에 창조력과 예술성이 생겨요." (같은 인터뷰)
"그 자체가 내 생명력" "끝까지 할 것"
식지 않는 '연기 열정'은 배우 이순재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제9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후인 2018년 11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이제 좀 내려놓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질문을 받자, 이순재는 "당장은 나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으니까"라며 "그게(연기가) 또 내 주 활동이고 그 자체가 내 생명력"이라고 답했다.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소감에 관해서는 "열심히 했을 뿐"이라며 "그냥 꾸준히 해 왔을 뿐인데. 하다 보니까 이제 제일 오래 하게 됐고 또 최고령이 되니까 그래서 감안해서 주신 걸로 알고 있다"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2023년 1월 CBS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도 이순재는 연기는 '도전'이며 '완성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작업이 예술, 일반 행위가 다 마찬가지다.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라며 "똑같은 할아버지인데 다른 할아버지를 위해서 노력을 하고 또 공부를 하고 뭔가 만들어놓으려고 노력을 하는. 그러니까 항상 새로운 거에 대한 도전"이라고 밝혔다.
"우리 예술은 완성이 없다. 항상 걸작과 대작이 있을 뿐"이라며 "우리는 어느 한때 훌륭한 배우, 훌륭한 예술가가 있었을 뿐이지 그게 그 예술의 끝은 아니고 완성은 아니라는 얘기"라고 한 이순재는 "정년이 없으니까 자기만 잘 버티면 쫓겨날 일이 없단 말"이라고도 덧붙였다.
지난해 5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도 이순재는 "항상 우리는 새로운 역할에 대한 창조,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것이 소위 말하자면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하나의 그 욕구고 하나의 조건이고 또 거기서 어떤 성취에서 오는 쾌감, 이런 것들이 있는 것"이라며 "배우로서는 연기 자체가 생명력"이라고 재차 말했다.
"지금 다 알고 계시는 정도로. 어떻게 마무리를 잘해야죠. 할 때까지 하다가. 깨끗하게 끝나야 될 텐데. 끝까지 할 겁니다. 그래서 소망은 하다가 쓰러지는 게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2023년 1월 '박재홍의 한판승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