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지난해까지만 해도 '현역'으로 활동했던 원로 배우 이순재가 지난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평소 끊임없는 연습을 바탕으로 한 '기본기'와 철저한 자기관리 능력을 강조해 온 고인은 쪽대본(시간에 쫓기는 탓에 완성된 형태가 아닌 낱장 형태로 쓰인 대본) 세태를 지적하고, 시청률 지상주의 탓에 양산되는 막장 드라마를 비판하는 등 업계를 향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인물로 유명하다.
쪽대본 문제 여러 차례 비판 "반드시 고쳐져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기자간담회가 열린 2006년 11월, 이순재는 이번 작품이 나오는 속도는 괜찮다고 만족감을 표한 바 있다. 신드롬적인 인기를 끌었던 사극 '허준' 촬영 당시 작가가 쪽대본을 쓰는 것을 보고 호통을 쳤던 그다.
이순재는 "그렇게 좋은 대본을 그렇게 다급하게 허둥지둥 만들어서야 되겠냐는 뜻을 전달한 거다. 지금의 드라마 제작 상황도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이번 작품의 대본 나오는 속도는 그래도 재미있게 적당한 속도로 나오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2011년 3월 MBC '욕망의 불꽃' 종방연에서 배우 대표로 종영소감을 할 때는 "'욕망의 불꽃'은 일주일 전에 대본이 나와서 여유가 있었지만 '마이 프린세스'는 회치기 대본이었다"라며 "이것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이순재는 '욕망의 불꽃'과 '마이 프린세스'에 동시 출연했는데, '마이 프린세스'는 생방송에 가까운 촉박한 일정으로 촬영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재는 "(대본이 늦게 나와) 시간에 쫓겨 연출과 대본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도 자신들이 가진 역량의 50~60%밖에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라고 개탄했다.
이어 "쪽대본은 방송국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방송사에서 외주제작사를 선정할 때 열흘 전에 대본을 받아볼 수 있도록 계약해야 한다"라며 "이제 영상산업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 전체로 수출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선 안 된다"라고 전했다.
2016년 2월 SBS '그래 그런거야' 제작발표회 때도 쪽대본과 관련해 언급했다. 방송 전이지만 '그래 그런거야'는 대본이 12회까지 나온 상태였다. 이순재는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쪽대본으로 연기하는 비정상적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라고 칭찬했다.
영화 '덕구' 개봉 기념 라운드 인터뷰를 진행한 2018년 3월에는 '드라마 제작 풍토 개선'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그는 "요즘 영화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드라마는 고쳐야 된다"라며 "방송 적폐가 바로 드라마 제작 풍토라고. 전 세계에 이렇게 드라마 만드는 데가 없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그는 "드라마는 우리끼리 보고 없애는 소모품이 아니다. 생산품을 이렇게 만들어서 경쟁하겠나. 심기일전해서 모든 역량을 발휘해도 부족한데"라며 "주인공을 맡으면 매일 밤을 새워야 한다. 대사를 충분히 외울 시간이 안 된다고. 다 외워서 해도 될까 말까인데 간신히 대사 외워서 무슨 연기가 나오냔 말이다. 이런 풍토를 만든 게 잘못된 것"이라고 질타했다.
'시청률 지상주의'도 지적
방송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방송인이 받는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배우 최초로 이름을 올렸던 이순재는 2009년 3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시청률과 상업성에만 치중한 '막장 드라마'와 관련한 생각을 밝혔다.
'막장 드라마'의 원인으로 "시청률 지상주의"를 꼽은 이순재는 "아쉬움이 있다"라며 "얼마든지 작품의 품격을 유지해 가면서도 시청률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요즘 시청률 만능 시대, 시청률 지상 최대의 시대가 되다 보니까 방송국들이 그런 방향으로 자꾸 유도를 하는데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라고 말했다.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시청자의 공감을 사는 작품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2012년 4월 SBS플러스 '그대를 사랑합니다' 제작발표회 때 이순재는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공감을 줘야 하는데 요즘 드라마는 현실과 동떨어진 특수한 설정이 많아 공감하기 힘들다"라고 꼬집었다.
같은 해 10월 '무자식 상팔자' 제작발표회 때는 이 작품을 두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라며 "일부 드라마가 망각하고 있는 궤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드라마가 상업주의로만 흘러서는 안 된다. 요즘은 시청률 때문에 드라마들이 상업적으로 흐르고 있다"라며 "드라마에도 사회적 가치관이 필요하다. 이 드라마는 구석구석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래 그런거야' 제작발표회에서 이순재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는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라면서도 "드라마는 안방극장에서 모든 대중이 보는 만큼 삶의 지혜를 주는 그런 요인이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영화 '덕구' 라운드 인터뷰 때 이순재는 영화 출연 계기에 관해 "아, 이건 억지가 없구나 하고 느낀 것이다. TV 드라마 중 어떤 작품은 억지가 많다. '뭐 이런 게 있어?' 하는 상황이 많이 있다. 시청률하고 상관없이"라고 답했다. 이어 "참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영화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잔잔한 얘기지만 큰 무리 없이 우리 일상의 정서를 따라 흘러가는 영화"라고 전했다.
'거침없이 하이킥' 기자간담회 때는 "방송사가 이제 시청률에 목을 매면서 상업성만을 생각하다 보니 드라마를 늘였다 줄였다 한다"라면서 "편성은 시청자와의 약속인데 시청자가 연장을 요청하지 않는 한 어설픈 연장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밝혔다.
故 장자연 사건, 버닝썬 사태에 의견 밝혀
배우들의 권리 확보와 노동 환경 개선 등을 위해 목소리 내기도 했다. 출연료 미지급 사태로 촬영 거부가 발생한 2012년 11월, 이순재는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한연노) 조합원으로서 기자회견에 참석해 직접 발언했다.
출연료 미지급을 두고 "창피한 일"이라고 일갈한 이순재는 "출연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에라도 촬영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언젠간 주겠지란 믿음으로 기다린 것이다"며 "방송을 펑크낼 수 없다는 책임감으로 밤을 새가며 작업을 했는데 돈을 못 받았다. 한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데 배우들의 상황이 이렇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과거 연기자들은 방송사의 공채로 선발돼 한 몸, 한 식구라는 인식이 있다. 외주제작이라는 제작 여건 변화에도 여전히 KBS 식구라는 자부심은 변하지 않았다. KBS도 식구라고 생각하고 조속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2005년 7월에는 한연노 무술연기자지부 창립식에 참석했다. 무술연기자들이 겪는 부적절한 출연료를 개선하고 안전 및 보험 혜택 등을 보장해 달라는 자리였다. 이때 이순재는 "늦지 않았나 생각도 들지만 권익과 사회적 보장을 위해서 하나로 뭉치는 것이 효율적이고 힘을 발휘할 수 있다"라며 "그동안 그늘에 있었지만 사실 연기자들이 할 수 없는 경지의 연기를 해왔다"라고 격려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했던 신인 배우 장자연의 자살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을 때, 이순재 역시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2009년 3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작년부터 젊은 친구들이 자꾸 세상을 떠나는데 안타까운 일"이라며 "우리 젊은 친구들을 활용하고 사용하는 쪽에서의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서 경쟁이 심해지고, '을'의 입장이 되다 보니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계약 관계도 형성되고 계약서에 대한 요구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 입장 이런 것들이 상당히 요인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이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방송국 쪽에서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다"라며 "자기반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다 잡을 수 있는 움직임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라고 부연했다.
그룹 빅뱅(BIGBANG) 출신 승리의 버닝썬 게이트, 정준영의 집단 성폭행 등이 불거졌을 때도 이순재는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2019년 4월 KBS2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이순재는 "법적으로 판단이 나겠지만, 뭔가 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엔 스스로 자퇴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건 인기가 올라갔을 때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거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밝혔다.
언제나 '기본' 강조, 팬들에게는 '감사'
2010년 6월 공개된 MBC스페셜 '순재 날다'는 '배우 이순재'에 초점을 맞춘 다큐였다. '순재 날다'에는 철저한 대본 숙지와 캐릭터 분석을 위해 긴 시간을 연습에 쏟고, 촬영장에 일찍 도착하는 것은 물론 현장의 최연장자라고 해서 먼저 촬영하겠다고 요구하지 않으며, 휴식 시간이 없어도 별다른 불평 없이 일하는 그의 모습이 담겼다.
은관문화훈장을 받고 난 2018년 11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유튜브에서는 "치매기가 살짝 와서 대사를 못 외운다든지 현장에 가서 녹화하면서 '다시. 미안해, 미안해' 5번 이상 하면 그때는 내가 그만둘 때가 됐구나"라고 운을 뗐다.
그는 "나 혼자는 어떻게 하겠지만 주변(에) 같이 하는 연기자들한테 피해를 주는 거니까. 그다음에 나이 먹어가지고 체면이 아니지 않나"라고 말했다. '미안해'라고 하는 횟수가 어느 정도인지 묻자, 이순재는 "그저 잘하면 한 번 정도 할까? 아직은 안 한다"라고 답했다.
'덕구' 라운드 인터뷰 때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공동 작업'이라는 점을 상기했다. 그는 "불평을 얘기할 순 있다. 그러나 일단 현장에 나왔으면 (그것마저) 감안하고 나온 것 아니냐는 말이다. 자기 불만을 얘기하더라도 현장에서 수용 안 된다면 감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적당히 왔다 갔다 하면서 용돈이나 얻어 쓰자' 이러면 안 되는 거다. 현장에서 우리랑 같이 작업하는 후배나 스태프가 우릴 불편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야, 난 나이가 있지 않냐' 이런 식으로 하면 (작품에서) 빠지면 된다. 오히려 더 잘 적응해 줘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을) 하고 싶고, 하는 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60년 넘는 배우 생활을 "후회는 없다"라고 정리한 이순재. "시작할 때 어려움을 각오하고" 나왔기에, "나는 불행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그랬으면 전직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성원해 준 시청자와 팬들에게는 감사를 전했다. '거침없이 하이킥' 출연 당시였던 2007년 7월 이순재는 "중견 연기자로서 젊은 팬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며 "연기 생활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팬들의 사랑이 연기자 이순재를 끊임없이 성장시켜 주고 있다"라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는 "그동안 많이 성원해준 네티즌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면서 "늙은 할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평생 의식하고 다음 작품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같은 해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탔을 때도 "유치원 팬서부터 청소년 팬 여러분 정말 감사드린다"라고 재치 있는 소감을 남겼다.
지난해 4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팬들에게 잘하지 못하는 일부 연예인의 태도를 지적했다. 이순재는 "사진 찍자고 하면 도망가고, 악수하자 그래도 안 하고. 난 이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악수하자고 하는 한 사람, 한 사람 감사해야 한다. 그 사람이 없으면 네 존재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존재(배우)는 소위 말하자면 대상이 있다. 나 혼자 모노드라마를 하는 게 아니다. 늘 관객이라는 대상을 놓고 한다. 그분 하나하나가 다 고마운 분들"이라며 "평생 많은 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성원을 해주셨다. 그래서 내가 오늘날까지 있는 거다. 그거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한다. 만나면 그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지나간 얘기 같이 나누며 허물없이 차 한잔 나누고 싶다"라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