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미제 '신정동 연쇄살인', 형사는 무전기 들고 과거로 갔다

서울경찰청 중요미제·장기실종사건수사팀장 김장수 경감
2021년부터 사건 맡아 사건 현장 수백 번 찾아가
수사 대상자 가래침 채취하고, 사망자로 확대
"매일 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중요한 것은 의지"
2016년 '초안산 집단 성폭행' 전말 5년 만에 밝혀내기도

지난 25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초등학교 앞.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한 김장수 경감이 1차 피해자 시신이 유기됐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 수백 번 와서 당시 행적 등을 따라 걸어봤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지은 기자

지난 25일 오후 3시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초등학교 앞. 아이의 학교 생활이 어땠는지 궁금한 어머니들과 삼삼오오 몰려 나오는 아이들이 교문 앞 풍경이었다. 어머니를 본 아이들의 빨라진 발걸음과 재잘대는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 시간, 김장수 경감(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 중요미제·장기실종사건수사팀)을 만났다.

키 175cm에 레슬링 선수 출신 다운  제법 건장한 체격의 김 경감은 수백 번 이곳에 왔다. 모든 현장에는 실마리가 남는 법. 20년 전 발생한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 시신이 발견된 곳으로, 2013년 미제사건으로 지정됐다. 김 경감이 수사를 맡은 5년 동안 현장은 변한 것은 없었다. "여기 담장이 좀 낮아졌어요". 미세한 변화조차 김 경감은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성폭행 흔적, 훼손된 시신…20년 전 '그놈'의 DNA

2005년 6월 1차 범행 당시 피의자 장씨가 포대와 노끈으로 묶어 초등학교 인근에 유기한 피해자의 시신.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 제공

2005년 6월 6일 이곳에서 쌀 포대에 담긴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성폭행 당한 흔적이 있었고 시신 일부가 훼손돼 있었다.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였다.

그날 피해자는 가족들이 TV 프로그램 유재석의 '진실게임'을 보고 있을 때 집을 나섰다고 한 사실을 김 경감은 떠올렸다. 낮 2시에 방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피해자는 집에서 참외를 몇 조각 먹고 나왔다고 했고 피해자의 위에서는 완전히 다 소화되지 않은 점심 음식물이 검출됐다. 그러니 범행이 이루어진 것은 오후 4시쯤일 것이다.

그날 오후 범인은 피해자의 시신에 쌀 포대 두 개를 씌워 노끈으로 묶어 신정동 한 초등학교 옆 주차장에 유기했다. 밤 11시쯤 한 주민은 커다란 쌀 포대가 길가에 버려진 걸 발견하고 통행을 위해 한쪽으로 들어 옮겨놨다고 했다. 시신은 그 이전에 유기됐을 것이다.

5개월 뒤인 2005년 11월 20일에는 신정동 주택가에서 비닐과 돗자리에 싸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2차 피해자도 이전 피해자와 동일한 수법이었으니, 동일범 소행일 것이다.

김 경감은 모든 범행의 흔적들을 머릿속에 되뇌며 20년 전 '그놈'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좀처럼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20년 전 강간·살인 용의자를 찾을 단서는 딱 하나, DNA.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의 DNA를 찾아, 당시 범행 현장에 남아 있던 DNA와 대조해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김 경감은 용의자들을 추리고 이들의 DNA를 확보해야 했다.

무전기 들고 과거로…가래침 모으고 사망자까지 분석

김 경감 사무실 책상에 놓여있는 무전기. 김장수 경감 제공

김장수 경감은 2021년부터 5년간 매일, 당시 범행 상황을 재구성했다. 눈을 감으면 현장들이 무심코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짚이는 게 없다.

김 경감의 사무실 책상엔 무전기가 놓여있다. 드라마 '시그널'에서 주인공이 과거의 형사와 무전기로 소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갔던 것처럼 그런 불가능한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다. 아주 지루한 수사의 연속이었다. 기록을 검토하고, 상황을 재구성하고, 범행 현장을 찾았다. 수백 번 찾았다. 현장에 쉽게 오가며 주차하고 다닐 수 있도록 낡은 경차도 구매했다. 그래도 매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1차 피해자 시신이 유기된 현장을 다시 살펴보러 온 김 경감의 경차가 주차돼있다. 김장수 경감 제공

김 경감은 사건의 모든 특징을 의심하며 집요하게 수사했다. 2차 피해자는 왼쪽 발에 신발, 양말이 벗겨져 검정 비닐이 씌워진 채 발견됐다. 이런 점이 혹시 의미가 있을까, 김 경감은 당시 신정동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용의자 중 왼쪽 다리가 불편한 경우를 다시 살펴봤다.

처음 고려됐던 수사 대상자들은 30~40만 명. 일일이 확인하기 불가능한 숫자였다. 그렇지만 자그마한 단서 등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시키면서 용의자를 조금씩 추려갔다. 범행 수법·직업·거주 형태 등을 분석하는 작업을 거쳐 추려낸 인원이 23만 명. 김 경감과 수사팀은 전국을 돌며 1514명의 유전자를 채취해 대조했다. 사람의 침에 DNA가 잘 검출된다는 사실을 아는 김 경감은 주말에도 대상자를 기다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가래침을 직접 채취하기도 했다.

"매일 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변하는 게 없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닌 건 조금씩 배제시켜 나갔다"

김 경감은 집요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용의자들의 DNA를 수집해나갔다. 그렇게 이번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된 장모씨를 특정하게 됐다. 당시 그의 행적과 전과 등을 고려할 때 유력한 용의자였다. 장씨는 2015년 사망한 상태였지만, 진실을 추척하는 형사 앞에 예외가 될 순 없었다. 병원 40여 곳 탐문 끝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장씨의 DNA는 2025년 5월 국과수에 맡겨졌다.

김 경감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2개월을 매일 잠을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지난 7월 9일, 결국 장씨의 DNA가 사건 증거물 DNA가 일치한다는 국과수 감정 결과가 나왔다. 20년 미제였던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드러난 순간이다.

물론 김 경감은 장씨의 DNA 분석 결과를 확인한 뒤에도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결과를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의문점이 많았다. 어디서 어떻게 납치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살해하고 이런 것들을 밝혀내야 했다"며 "국과수 감정서, 최종 행적, 목격자 진술, 그날 날씨 등을 다 종합해서 몇 시쯤 범행을 저질렀고 밤 11시 전에는 유기했다는 추정을 했다"고 설명했다.

김 경감이 소속된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는 2005년 양천구 신정동에서 연달아 발생한 부녀자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당시 범행 장소인 신정동의 한 빌딩 관리인 장(범행 당시 60대)씨를 특정했다고 지난 21일 밝혔다.

2005년 6월 6일 1차 사건 피해자는 병원 진료차 장씨가 일하는 건물에 방문했다. 장씨는 "휴일이라 문이 잠겼으니 지하로 가라"며 피해 여성을 유인한 뒤 지하 1층 창고로 데려가 성폭행한 뒤 살해했다. 2차 피해자도 같은 방식으로 범행을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장씨는 이듬해인 2006년 2월쯤 같은 건물에서 같은 방식으로 범행을 하다가 피해자가 도주하며 검거됐다. 당시 장씨는 앞선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특정되지 않고 강간치상 혐의만 받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약 3년간 복역했다. 또 과거에도 성범죄 등 3회 이상의 전과가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제사건, 누군가는 수사 계속하고 있어"

김장수 경감이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범행이 벌어진 건물 지하를 수색하고 있다. 김장수 경감 제공

김 경감은 "미쳐도 안 되는 게 미제 사건"이라면서도 "피해자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범인을 반드시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끈질기게 수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초안산 집단 성폭행' 사건의 범인을 5년 만에 밝혀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2012년 8월 서울 도봉경찰서에서 근무하던 김 경감이 고등학생들의 집단성폭행을 수사하다가 인지했다고 한다. 그는 다른 경찰서로 전출을 가면서도 사건을 놓지 않고 피해자를 꾸준히 설득해 22명의 가해자를 밝혀냈다. '초안산 집단 성폭행 사건'부터 이번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까지. 김 경감이 전한 수사의 왕도는 간단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의지. 의지가 없으면 해결할 수 없다"

이번 사건 피해자 유족은 범인을 밝혀냈다는 김 경감의 말에 "아직까지도 수사하고 있는지 몰랐다.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미제사건은 결과가 당장 안 나올 뿐이지 누군가는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사망해도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끝까지 쫓는다"라고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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