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꿈꾸다 이젠 해외로"…영어학원으로 퇴근하는 IT개발자들

"국내선 비전 없다"…해외 이직 위해 다시 '영어' 잡는 판교 IT개발자들
판교·분당 어학원 "수강생 70%가 IT 종사자, 2년 새 급증" 기현상
연봉 격차에 인프라 한계까지…AI 인재 '엑소더스'에 국가 경쟁력 경고등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한 성인 영어 회화 학원. 이 학원 측은 최근 2년 새 IT 개발자 수강생이 가파르게 증가해 현재 원내 최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양지훈 인턴기자

"아, 이거요? 영어 회화 스터디 자료예요."  

지난 17일 저녁 8시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인근 건물 엘리베이터에 오른 AI 머신러닝 기술자 이모(31)씨는 손에 A4 십수 장을 들고 있었다. 영어로 질문과 답변을 정리한 대화록이 종이 안에 빼곡했다. 주 2회 1시간 정도 간단한 기본 일상 대화를 나눈 후 헤어지는 모임이지만, 이씨는 이곳에 참여하는 결정에 큰 결심이 필요했다.

6년째 대학 졸업에 필요한 영어 자격증 점수를 맞추지 못할 정도로, 전부터 '영어 공포증'이 심각했다. 최근 해외 기업에 이직하겠다고 계획한 후 다시 영어 공부를 붙잡았다. 그는 "퇴근 이후 집에 들릴 시간이 부족해 저녁도 아예 이 근처에서 먹는다"면서 "진입 장벽을 낮춘 후 서서히 면접 대비 스터디도 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날 판교역에서 IT 중소기업에서 백엔드 개발자로 일하는 김모(43)씨도 최근 동료 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전했다. 코로나 사태 직후 불경기 때도 "IT업계가 불황"이라며 이직 고민을 은근히 드러내는 동료들이 많았지만, 이제 이 말의 속뜻이 전혀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팬데믹 직후에는 '불황에 살아남는 건 결국 대기업'이라면서, 국내 이직을 꿈꿨다면, 요즘은 '외국 안 나가면 10년 안에 그만두게 될 것'이라면서, 해외 이직 고민을 털어놓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라고 토로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역 성인 영어 회화 전문 평생교육원. 최근 신규 회원에서 IT개발자 비중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양지훈 인턴기자

이 같은 IT 개발자의 해외 이직 열기는 학원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2019년부터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성인 대상 소수정예 원어민 영어 회화 수업을 운영한 A어학원은 전체 수강생 중 IT 개발자의 비율이 최근 1~2년 사이에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전했다. 이 어학원 상담 직원 A씨는 "원래 수강생 중 스튜어디스, 한국에 지점을 둔 외국계 회사 재직자 순으로 수강생이 많았으나, 최근 IT 개발자 수강생 비율이 가장 높아졌다"면서 "최근 원어민 교사도 새로 채용했다"고 밝혔다.  

A어학원에서 두 건물 건너에 위치한 영어회화 평생교육원 B도 사정이 비슷했다. 이 평생교육원 직원은 "신규 등록 회원 중에서 IT 개발자가 최근 정말 많이 등록한다"면서 "2년 전 대비 70% 정도 신규 회원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CBS 노컷뉴스 취재진이 IT 기업이 밀집한 판교, 분당 일대 성인 영어 회화 학원 12곳에 직접 확인한 결과, 학원 측은 2년 전 대비 직장인 수강생이 10~20% 증가했다고 대답했다. 이중 수강생 중 IT 개발자의 비율을 답변한 6곳의 경우, 전체 수강생 중 IT 개발자의 비중이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70%라고 전했다.  

어학원이나 교육기관 등 학원 활용 사례 외에도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해외 취업 스터디를 구하는 사례도 눈에 띄게 늘었다.

IT 개발자 해외 이직 스터디를 운영하는 C씨는 최근 해외 취업을 준비하는 동료들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그는 "AI 기술의 메인스트림이 미국에 있다 보니, 이런 경험을 하려는 동료들이 주변에 많아졌다"면서 "현재 운영 중인 스터디에도 6명이 함께 모의 면접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외에서도 한국의 이 같은 현상을 단순한 개인의 도전을 넘어 심각한 '두뇌 유출(Brain Drain)'의 징후로 보고 있다. 스탠퍼드대 'AI 지수' 등 주요 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인도, 이스라엘과 함께 AI 인재 유출이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데, 이는 국내외 빅테크 기업 간 3~4배에 달하는 연봉 격차와 연구 인프라 차이가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기술 패권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재 관리와 확보를 위한 국가적 전략과 IT산업 생태계 조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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