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丙午年)이 밝았다.
병오는 하늘의 기운을 상징하는 10천간(天干)과 땅의 기운 12지지(地支)로 조합된 60갑자(甲子) 중 43번째 간지이다. 병(丙)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오행(五行) 중 불(火), 오(午)는 말을 상징한다. 즉, 병오년은 '붉은 말'의 해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丙)과 역동적으로 질주하는 말(午)이 만난 강렬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한국인의 신화와 설화 속에서도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존재이자 수호와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자주 출현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에는 백마가 등장한다. 경주 나정(蘿井) 부근, 하늘에서 내려온 흰말이 지키던 보랏빛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기록이다. 하늘을 나는 백마는 경주 황남동 고분 천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207호 '천마도(天馬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마 유목 민족 스키타이와 유사성이 짙은 신라에서 말은 하늘과 땅을 잇는 전령으로 중시됐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등의 고구려 건국 신화에는 용마(龍馬) 이야기가 나온다. 천제(天帝)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은 용의 피가 섞인 명마를 한눈에 알아보고, 말의 혀에 바늘을 꽂아 일부러 마르게 한 뒤 부여국 금와왕을 속여 말을 얻어낸다. 주몽은 용마의 바늘을 뽑고 잘 길러 회복시킨 뒤 그 말을 타고 부여국을 탈출해 자신의 나라 고구려를 세운다. 주몽은 인근 비류국 왕과의 정통성 대결에서도 용마를 타고 물 위를 달려 항복을 받아 낸다.
이처럼 말은 신화 속 영웅에게 충성을 다하는 용맹스런 조력자일 뿐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강력한 왕권을 증거하는 영물(靈物)이었다.
중세에 와서도 말은 특별한 존재였다. 거란을 물리치고 고려를 구해 후대에 신격화된 강감찬 장군은 말과 관련한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장군의 말은 귀주대첩에서 입에서 불을 뿜으며 거란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슬피 울다 굶어 죽었고 장군의 무덤 근처에 함께 묻혔다는 충절의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홍건적과 여진족, 왜구를 공포에 떨게 했다는 여덟 마리의 명마, 팔준마(八駿馬)가 유명하다. 팔준마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첫머리에 그 이름과 공적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유린청(遊麟靑)은 여진과의 함주 전투에서 몸에 화살을 세 대나 맞고도 끝까지 태조를 태우고 활약했고, 추풍적(追風赤)은 '바람을 쫓는 붉은 말'이라는 이름처럼 매우 빨랐다고 한다. 팔준마는 '용비어천가', '팔준도' 등 예술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왕실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말은 큰 사랑과 존중을 받았다. 이동 수단인 말은 현대의 최고급 자동차처럼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일반 남성들은 일생에 한 번(?) 장가갈 때나 고위 관리가 입는 사모관대를 하고 백마를 타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백성들은 또 호환·마마로부터 지켜 달라고 마을 입구에 철이나 돌로 만든 철마(鐵馬), 석마(石馬)를 세워놓기도 했다.
새해가 밝았지만 국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푸른 뱀'(을사년)이 몰고 온 혼란과 불안을 '붉은 말'이 불태워 말끔히 걷어내주기를 바란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켜 새롭게 도약하고 비상하는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