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어느 날, 67세의 한 할머니가 가족에게 짧은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산책 좀 다녀올게."
그 산책은 146일 동안 이어졌고, 무려 3500킬로미터에 달했다. 미국 장거리 트레킹 코스인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한 최초의 여성, 엠마 게이트우드의 이야기다.
벤 몽고메리가 쓴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은 미국에서 한때 '가장 유명한 여행자'로 불렸지만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게이트우드의 삶을 복원한 논픽션이다. 저자는 그녀가 남긴 일기와 편지, 유족 인터뷰,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여성의 놀라운 도전과 인생을 추적한다.
게이트우드는 트레킹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길을 떠났다. 침낭도 지도도 없이 작은 자루 하나만 어깨에 멨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허리케인과 홍수, 어둠과 야생동물, 더위와 추위가 이어지는 산길에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하루 평균 25킬로미터를 걸으며 조지아주에서 메인주까지 이어지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완주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자 떠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길 위에서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낯선 이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게이트우드는 개의치 않았다. 서스쿼해나 강을 건넌 뒤 식당에서 토마토 샌드위치를 먹고 바나나 스플릿을 주문하는 소소한 순간 속에서도 그녀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이 여정은 단순한 모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게이트우드는 11명의 자녀를 키우며 오랜 세월 가사노동과 빈곤, 그리고 남편의 폭력 속에서 살아온 생존자였다. 30년 넘게 이어진 폭력적인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한 뒤,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자 비로소 자신을 위한 길을 선택했다. 숲은 그녀에게 오랫동안 도피처이자 자유의 공간이었다.
게이트우드의 도전은 미국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신문 기사와 방송 뉴스가 그녀의 여정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완주를 응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유명세에 큰 관심이 없었다. 왜 그렇게 먼 길을 걷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늘 같은 말을 남겼다.
"그냥 재미 삼아서요."
첫 완주 이후에도 그녀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77세에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세 번 완주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평생 2만2,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었다.
책은 이 놀라운 기록을 단순한 등산 이야기로 그리지 않는다. 게이트우드의 삶과 함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 애팔래치아 산악지대의 역사와 트레일 개척 과정까지 함께 보여준다.
게이트우드는 자신의 도전을 특별하게 포장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한 발을 먼저 내딛고, 그다음 발을 내딛으면 된다. 그걸 500만 번 정도 반복하면 되는 거죠."
벤 몽고메리 지음 | 우진하 옮김 | 수오서재 | 400쪽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가 일상이 된 시대, 우리는 자연을 흔히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환경 사상가 데이비드 패리어는 신간 '자연의 상상력'에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자연은 단지 피해자인가, 아니면 변화 속에서 스스로 해법을 만들어온 존재인가.
책은 자연이 보여준 놀라운 적응 사례들을 통해 인간이 배울 수 있는 생존의 지혜를 탐구한다. 예컨대 도시의 열섬 현상에 적응한 달팽이는 껍데기 색을 바꾸고, 오염된 강에 사는 물고기는 독성에 저항하는 변이를 빠르게 만들어낸다.
어떤 새들은 건물 외벽에 설치된 조류 퇴치용 철심을 뜯어 둥지를 짓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새로운 서식지로 바뀌는 순간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자연의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이는 공상이 아니라,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축적해온 전략과 실험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뇌가 없는 점균류조차 먹이를 향한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계산해 도쿄 지하철 노선도와 유사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실험 결과가 소개된다. 지능과 문제 해결 능력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책은 자연의 적응력뿐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원리를 배우려는 시도도 함께 조명한다. 나뭇잎이나 사과 껍질, 새우 껍질에서 만든 바이오 소재, 폐기물을 재활용한 건축 실험 등은 자연의 구조와 순환 방식을 모방하려는 시도다. 저자는 미래가 기술의 통제력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자연의 상상력'은 환경 위기를 경고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대신 40억 년 동안 변화에 대응해온 자연의 전략을 따라가며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공존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저자는 결국 바뀌어야 할 것은 기술보다 태도라고 말한다. 속도보다 감수성, 확장보다 협력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패리어 지음 | 이은진 옮김 | 김영사 | 4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