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의 신작 소설 '처단'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를 모티프로 삼은 작품이다. 부커상, 전미도서상, 필립 K. 딕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한국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넓혀온 작가가, 이번에는 한국 사회가 실제로 겪은 가장 불안한 순간을 소설로 끌어왔다.
소설은 "이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한 문장은 작품의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공식 기록이나 뉴스 기사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공포, 상처, 그리고 그 밤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감정을 문학으로 복원하겠다는 뜻이다.
'처단'이 주목하는 것은 계엄이라는 거대한 정치 사건 자체보다, 그 몇 시간 동안 직접 흔들렸던 사람들의 삶이다. 병원에 입원한 아내 곁을 지키는 노동조합 상근자,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병원 복도를 떠도는 사람, 장애인 활동가, 이주노동자, 학교 밖 청소년, 간호사, 집회 현장의 시민들까지. 작가는 평소에도 쉽게 밀려나고 지워지는 사람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이들에게 계엄은 TV 속 뉴스가 아니라 삶을 바로 무너뜨릴 수 있는 현실의 폭력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소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국가 폭력은 가장 먼저 누구를 덮치는가. 누구의 몸과 일상, 생존이 가장 먼저 흔들리는가.' 정보라는 이 질문을 현실 묘사와 SF적 상상력을 섞어 풀어낸다.
작품에는 실제 현실에 닿아 있는 장면들이 많지만, 동시에 그 현실이 조금만 더 악화됐다면 벌어졌을 법한 끔찍한 상상도 담겨 있다. 그래서 '처단'은 현실소설 같으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장르소설처럼 읽힌다. 독자는 "그날 계엄을 막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제목인 '처단' 역시 강한 의미를 갖는다. 원래 국가 권력이 시민을 향해 쓸 수도 있었던 폭력의 언어가, 이 소설 안에서는 오히려 억울하게 죽고 지워진 존재들의 목소리로 바뀐다. "죽은 자들이 일어섰다"는 문장은 그 전환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살아 있을 때 말하지 못했던 이들이, 죽어서 돌아와 자신들의 억울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지 복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연대와 돌봄이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도 누군가를 감싸 안는 손길, "저한테 기대세요"라고 말하는 간호사, 이름 없이 서로를 부축하는 시민들, 삶이 있는 곳으로 끝내 걸어가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중심에는 분노만이 아니라, 공포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처단'은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가장 빠르고도 강렬한 문학적 응답으로 읽힌다. 이 작품은 계엄을 단순한 정치 이슈로 다루지 않는다. 그날의 공포가 병원, 거리, 노동 현장, 소수자의 삶 속으로 어떻게 파고드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작가는 공식 기록이 끝내 다 담지 못할 어떤 진실, 곧 시민들이 끝내 무너지지 않고 함께 버텨낸 순간을 소설로 남긴다.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