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미국 증시 상장 절차에 돌입했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증시에 진출함으로써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상장 방식을 둘러싸고는 일각에서 주주가치 희석 우려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우려하는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정기 주주총회(주총) 당일인 25일 오전 "미국 증권시장 상장을 위한 절차의 일환으로 어제(24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당사의 미국 주식예탁증서(ADR)에 관한 상장 공모 관련 등록신청서(Form F-1)를 비공개로 제출했다"고 공시했다.
ADR은 기업이 보유한 주식을 예탁기관에 맡기고 이를 담보로 발행해 미국 증시에서 주식처럼 거래될 수 있도록 한 증서를 의미한다. 이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상장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연내 상장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으나, 현재 상장 공모의 규모와 방식, 일정 등 세부사항은 확정되지 않았다"며 "최종 상장 여부는 SEC의 등록신청서 검토, 시장 상황, 수요 예측과 기타 제반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구체적인 사항이 확정되는 시점 또는 6개월 이내에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의 이 같은 미국 증시 상장 추진 행보에는 글로벌 경쟁사 대비 주가 가치가 저평가돼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실제로 작년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은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을 수배 웃돌지만, 주가수익비율(PER,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값)은 마이크론에 미치지 못한다. 이날 공시 이후 열린 주총에서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도 ADR 상장 절차 착수 건과 관련해 "세계 최대 주식시장이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상장된 미국 시장에서 당사의 기업 가치를 재평가 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곽 사장은 나아가 2026년 사업 전략을 제시하며 "100조 원 이상의 순현금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목표 설정의 이유로는 "AI 기술이 고도화되고, 컴퓨팅 인프라 투자가 확대됨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중장기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본다"며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재무 건전성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주주들의 비판적 의견 개진도 이뤄졌다. ADR 상장이 신주 발행을 토대로 이뤄질 것이라고 알려진 데 대해 한 주주는 "왜 신주 발행 방식으로 ADR 상장을 하려 하느냐. 자사주를 매입해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신주 발행분 만큼 주주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100조 원 이상의 순현금 확보 계획에 대해서도 "100조 원을 모으면 또 200조 원을 모은다고 할 것이냐"며 보다 적극적인 주주환원 방안 제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주 뿐 아니라 민간단체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도 논평을 통해 "잉여현금흐름이 넘치는데, 기존 주주 입장에서 지분이 희석화되는 신주 발행 방식은 반대"라는 입장을 표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곽 사장은 "목표로 하는 현금의 규모가 있어 순서가 좀 바뀌었을 뿐이며, 결과적으로 주주환원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당사의 순현금 규모는) 글로벌 경쟁사 대비 10분의 1 정도다. 100조 원 정도는 있어야 꾸준히 투자와 성장을 이어갈 수 있고, 그렇게 돼야 주가도 오르고 배당과 자사주 소각도 지속 가능하다. 여러 가지가 동시에 벌어지는 과도기여서 주주들이 만족하지 못할 수 있는데, 참고 기다려주면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금융투자 업계에선 최대 변수는 상장 시점의 시장 환경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전문가는 "신주 발행 방식으로 상장이 이뤄진다면 발행분 만큼의 주주가치 희석 우려가 나오는 건 자연스럽다"며 "다만 그 규모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이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글로벌 인지도를 높이면서 저평가 된 주식 가치를 경쟁사와 같은 시장에서 '키 맞추기'를 할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국 시장에 상장되면 그 가치가 국내 증시에도 반영될 것"이라며 "중요한 건 결국에는 상장 시점의 반도체 경기를 비롯한 시장 환경이 주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곽 사장은 주총 현장에서 반도체 시장 환경과 관련해 메모리 산업이 구조적 성장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설명도 내놨다. 그는 "메모리 업황은 업 앤 다운이 반복되는 사이클을 탔는데, AI 시대로 오면서 이 흐름이 조금 바뀌는 것 같다"며 "그런 반복 사이클에서 탈피하는 양상이 감지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에 적응해 회사가 꾸준히 수익을 내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액면 분할을 고려하고 있느냐'는 주주 질문에는 "액면분할은 주가 수준 뿐 아니라 거래량, 투자자 구성, 시장 전망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라며 "현재까지는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게 없다"고 곽 사장은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