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신촌블루스 출신'이라는 수식어를 듣는 게 매번 반갑지만은 않았다. 객원 보컬로 보낸 시간이 2년 정도로 짧기도 했고. 하지만 노래를 부르기 위해 무대에 올라가기 전 '신촌블루스 출신'이라는 소개가 나오면 그때부터 관객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강허달림이라는 사람을 몰랐던 이들도 "(노래를) 들으려고 준비하는" 것을 보고 "어마무시한 후광"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신촌블루스 한번 해 볼래?'라고 제안한 엄인호와의 듀엣곡을 쓰고 싶었던 이유다. "짧지만 2년 동안 했던 신촌블루스라는 게 제 음악 인생에서는 '너무 큰' 시기였고, 우산 같았다는 걸 알았죠. 신촌블루스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자, 저를 픽업하신 엄인호 선생님께 제 나름의 공식적인 방법으로 감사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어요."
스승이자 대선배인 엄인호와 같이 부를 노래라는 생각에 부담만 쌓였다. 실은 세 번째 정규앨범 '러브'(LOVE)에 싣고 싶었지만 결국 못 썼다. 총 9곡이 실린 이번 앨범에서 강허달림이 쓰느라 가장 애먹은 곡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당신이 내게 준 노래라는 것이'(feat. 엄인호)는 강허달림의 지난 20년을 돌아보는 앨범의 타이틀곡이 됐다.
제일 쓰기 어려웠던 타이틀곡부터, 강허달림의 음악을 지탱해 온 원동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는 마지막 곡까지 2곡은 직접 썼다. 노영심·이병률·이한철·소히·김인선 등과 협업한 신곡 2곡, '지금'의 강허달림으로서 다시 부른 본인의 대표곡 3곡('기다림, 설레임' '꼭 안아 주세요' '그대는 내 사랑'),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해 낸 명곡 2곡까지 총 9곡이 실린 앨범 '강허달림 20th'가 2025년 12월 발매됐다.
CBS노컷뉴스는 20년 넘게 꾸준히 노래해 온 강허달림을 지난 25일 오후 서울 양천구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만났다. 직접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만들어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획자이면서 제작자인 그에게 20주년 기념 앨범 '강허달림 20th' 제작기를 들었다. 인터뷰 첫 번째 편에서는 타이틀곡을 비롯해 개별 곡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본인이 쓰는 곡이 적어도 엄인호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강허달림은 "음악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가이시고, 평소 듀엣을 많이 하는 분도 아닌데 음악이 이상하면 안 되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제일 오래 걸렸다. 한 석 달? 특히 가사 쓰느라고 면역 질환까지 올라왔다.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으아! 정말 못 하겠다!' 했었다"라고 털어놨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곡, 만족도는 어떨까. 강허달림은 "제일 좋았던 건 엄인호 선생님이다"라며 활짝 웃었다.
"곡을 얼추 작업하고 나서 편곡할 때 선생님 뵙고 (듀엣) 해 달라고 했어요. 한순간에 '오케이'(OK) 하셨고, 곡을 들려드렸는데 '혹시 이상하다고 하면 어떡하지?' 했죠. '어~ 괜찮다, 해 볼게!' 딱 하셨어요. 그날 이후로 심심하면 연락이 오시는 거예요. '야, 목이 아프다' '멜로디가 안 익혀지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허리가 아파가지고 죽다 살아났어~' 하고. 당신이 40년 넘게 음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음반도 아닌 다른 사람의 음반에 녹음할 노래 하나에도 스스로 (높은 기준의) 강박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40년 넘게 지금도 기타를 치면서 필드(현장)에서 음악하는 이유가 이거구나 했어요."
강허달림은 "선생님 공연하실 때 보면 너무 (소리를) 지르시는 거 같더라. 보컬리스트로서 애정이 있는 김현식 선생님 (창법을) 너무 따라가시려고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방송에 나오셔서 풀 밴드로 기타 치면서 노래하시는데 듣도 보도 못한 소리로 읊조리듯 노래하시는 거다. 레나드 코헨(Leonard Cohen)처럼 하시는데 깜짝 놀랐다. 그걸 보고 '저런 스타일로 곡을 써서 듀엣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라고 말했다.
같이 부를 곡을 처음 들려준 이후 "심심하면 연락이 왔던" 엄인호는 녹음 바로 전날까지도 강허달림에게 전화했다. '벌벌 떨린다'라며 "온갖 핑곗거리"를 얘기하던 엄인호가 녹음 부스에 들어가 첫 소절 '지난'의 음을 뱉었을 때, 강허달림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주저앉았"다. 스튜디오에 있던 모든 사람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내 노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와이프하고 (강허)달림이밖에 없다'라는 말을 직접 했던 엄인호의 일화를 소개한 강허달림. 방송과 매체로 공연을 접한 후 '가수' 엄인호로부터 새로운 인상을 받았고, 평소에도 엄인호의 '노래'를 각별히 생각해 온 그조차도 녹음 당시 들었던 '첫 귀'가 가장 생생하다.
"녹음실에서 첫 음을 딱 뱉는데… 보통 선생님이 기타리스트로 알려져 있잖아요. 근데 그 정도의 소리 질감일 거라고, 상상을 못 한 거죠. 40년 연륜이 느껴졌달까요? 저는 주저앉아 울고, 녹음실에 있는 베테랑들도 다들 꼼짝 않고 선생님 노래를 들었어요. 선생님은 녹음실 나와서 들으면서 너털웃음 지으시더라고요. 당신도 모르셨나 봐요, 그런 소리를 갖고 있다는 걸. 그 곡은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저는 다 끝났어요. 처음 들었을 때 그 느낌 하나로요."
누군가를 주저앉히고, 숨죽이게 만든 노래를 부른 엄인호. 다른 이들의 반응도 썩 좋았던 모양이다. 강허달림은 "선생님이 전화하셨는데 '야, 내가 친구들한테 들려줬는데 그 곡이 좋댄다' 하시면서 너무 신이 나신 거다. 친구분들이 '네가 이렇게 노래 잘하는지 몰랐다'라고 했다고 전해주셨다"라고 말했다.
연말에도 연초에도 쭉 연락해 오는 엄인호와 다음 작품도 준비 중이라는 강허달림은 "재미난 거 좀 해 보자고 하셨으니까, 다음 거는 선생님이 곡을 쓰실 거다. 저도 연락해서 빨리 쪼아야겠다"라며 웃었다.
강허달림이 작사·작곡한 다른 곡은 앨범의 맨 마지막을 장식한 '그대는 여전히 꿈을 꾸는가?'다. 열아홉 살, 상경하던 날 버스터미널 플랫폼에서 손 흔들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만든 곡이다. 강허달림은 "제가 처음으로 음악하려고 고향 떠날 때 기억이 항상 남아 있다. 한 번 정도는 어머니 얘기를 해 보고 싶어서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당연히' 노래 제목까지 고려해 마지막에 배치했다. 강허달림은 "저는 꿈을 위해서 기타 하나, 배낭 하나 메고 서울 올라와서 이 순간까지 지내면서 꿈을 이뤘다. 어느 순간, 꿈을 이루고 나서 '나는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더라. 꿈을 이루긴 했는데 그다음 꿈은 무엇일까. 음악을 처음 대할 때의 절실함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 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라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꿈을 꾸는가?'라는 질문에 지금의 강허달림은 어떤 답을 할까. 그는 "선망으로서의 꿈이라고 한다면 (지금과는) 너무 질감 차이가 많이 나서… 이룩했으니 유지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라며 "제일 돈 안 되는 음악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 잘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협업한 신곡은 두 곡이다. 말과 노래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선인장'은 피아노 연주가이자 가수인 노영심이 작곡하고 시인 이병률이 가사를 썼다. '우리는 없어요' '가진 게 없어요' '우리는 혼자죠' '영원히 혼자죠' '이번 생은 꽃 이름 하나 알고 가는 것' '아름다운 단 한 사람을 알았다는 것'이라는 가사, 피아노와 현악기 연주, 편안한 보컬이 어우러졌다.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곡 줄 엄두를 안 내서" 초기부터 스스로 곡을 써 왔다는 강허달림. "그래도 20주년"이니까 좀 더 의미 있는 곡을 수록하고 싶었던 차에, 종종 만나는 노영심이 만든 자리에 나가게 됐다. 평소 강허달림을 좋아해 꼭 만나보고 싶었다는 김혜순 명장도 같이 있는 자리였다.
노영심은 정규 3집 '러브' 발매 때도 고생했다며 밥을 사 준 선배였다. 모임에 초대되고 나서 문득 '영심 선배 만나니까 곡 하나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 한 잔 마시고 분위기가 적당히 올라왔을 때 "선배, 나 20주년이니까 선배가 곡 하나 써 주세요" 했다. 노영심은 "그래? 그럼 가사는 (이)병률이한테 해 달라고 하자"라며 승낙했다.
이병률이 작사한 곡은 원래 3집에 넣으려고 했으나, 그 가사에 걸맞은 곡을 스스로 쓰지 못했다는 게 강허달림의 설명이다. 먼저 나와 있던 이병률의 가사에 노영심이 노래를 붙인 '선인장'은 이렇게 '강허달림 20th'의 여섯 번째 트랙으로 실리게 됐다. 강허달림은 "일이 되려고 하면 이렇게 되더라. 저는 그런 기운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한철이 작곡하고 김인선과 소히가 작사한 '마침내 석양'은 밝음과 따뜻함 속에 삶의 진심으로 담아낸 노래다. "음반의 스토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라고 운을 뗀 강허달림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곡 2곡, 제가 쓴 곡 3곡, 커버곡 3곡 이렇게 해야지 싶었다. 누가 있을까 했는데 방송에서 이한철 선배님을 간만에 만났다"라고 밝혔다.
"선배님도 직접 (앨범을) 제작하시는 분인데, 달림씨 음악 지금까지 다 들어봤는데 예전보다 단단해졌다고 좋은 얘길 많이 해 주시는 거예요. 제가 고민했던 지점에 관해 가장 많이 질문해 주셔서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수다를 떨었어요. 실제로 제작하는 뮤지션이 없는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위안이 됐죠. 저 정도로 공감할 수 있는 선배라면 곡 하나 부탁해도 스토리가 만들어지겠다 해서 말씀드렸고 '마침내 석양'이란 곡이 나온 거죠."
강허달림은 "(선배가) 가요를 주로 쓰시다가 제가 블루스를 하는 사람이니까 고민 되게 많이 하신 거 같더라"라며 "처음에 미디로 찍어서 곡을 주셨는데 (이원술) 프로듀서가 현(string) 소리가 들어가게 바꿨다. 그래서 더 풍부하고 현대적으로 나왔다"라고 소개했다.
'하숙생'(원곡 최희준)과 '그때 그 사람'(원곡 심수봉)을 싣게 된 계기도 물었다. "보컬리스트로서 제게 거의 만족해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제 목소리를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원 테이크(한 번에 녹음)를 해요. 찍으면서 못 하고." 자기 목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그가 "부르는 느낌도 좋았고, 녹음 후 모니터한 느낌이 좋아서 '아, 노래하는 맛이 이런 건가' 했다"라고 체감한 곡이 바로 '하숙생'이다.
"대중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워너비는 심수봉 선생님"이라고 말문을 연 강허달림은 "어떻게 노래를 그렇게 잘 만드시고 쉽게 부르시는지… 워낙 대단한 분들이 많지만, 뽕끼 있는 그렇지만 아주 촌스럽지는 않고 재지한 곡을 쓰시는 데에서 심수봉 선생님을 항상 선망한다. 특히 가사 쓰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쓰실 수 있을까 한다. 쉬운 듯하지만 감성을 건드리는 곡을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지, 마음속 깊숙이 숙제를 던져주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 심수봉의 노래 중에서도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본인 음역에 맞게 반 키 정도 내렸다. 강허달림은 "보컬 앨범은 보컬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좀 심플하게 멜로디만 살아있길 바랐다. 제가 스캣(scat, 가사 일부에 뜻이 없는 후렴을 넣어 노래하는 방법)하는 사람도 아니니 진행을 너무 화려하게 안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라고 전했다.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차분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도입부에 살짝 변주를 줬다. 그는 "처음부터 탁 터트려서 '강허달림이 이 노래를 부르네?' 하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도입부가) 부담스러워서 얘길 했는데, (이원술 프로듀서가) 다른 건 되게 다 받아들여 주셨는데 이건 그대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라고 밝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