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 미국 펜타곤에서 한 기도가 생중계되었다.
미·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작전이 개시된 뒤 처음 열린 기독교 기도회에서, 미국 정부 안보라인의 한 고위 공직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모든 총탄이 적의 과녁을 찾아가게 하소서.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하게 해달라.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청한다."
사흘 뒤 종려주일 아침, 교황 레오 14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전쟁을 거부하시며, 아무도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분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의 기도를 거부하십니다." 같은 주간, 예루살렘 성묘교회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종려주일 예배가 봉쇄되었다. 이스라엘 경찰이 가톨릭 지도자들의 입장을 막은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전쟁이, 종교의 성지마저 닫아버린 역설이었다.
이 세 장면이 하나의 근원적인 물음을 불러낸다. 신은 누구의 편인가. 이 물음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도 수천 년 동안 서로의 피를 흘려왔다. 중세의 십자군은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외치며 진격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도 교전국들은 저마다 신의 이름으로 승리를 기원했다. 달라진 것은 없다. 총구의 방향만 바뀌었을 뿐, 신을 전쟁의 도구로 삼는 방식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신은 우리 편이고, 적은 악이며, 폭력은 신의 뜻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같은 하늘의 신이 두 기도를 동시에 들어줄 수는 없다. 신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십자가 사건이 있다. 예수는 로마 제국 앞에서 칼을 들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았고, 보복하지 않았으며, 오직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였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였다. 그러나 사랑이 마침내 승리했다. 신은 황제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의 손을 들어 부활로 응답하셨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수십억 인류의 가슴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황제의 칙령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위의 마지막 선언—인류를 향한 신의 보편적 사랑의 완성이었다. 복음이 특정 권력과 결탁하는 순간 사랑은 우리 편만을 향한 선택적 감정으로 좁아지고, 아전인수의 신학은 그 필연적 귀결이다.
지금 인류는 인공지능과 기술 혁신이 이끄는 거대한 전환기 앞에 서 있다. 세계는 이전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은 세계 유가를 끌어올리고, 그 충격은 지구 반대편 서민의 밥상까지 흔든다. 역사는 냉정하게 말해준다. 2차 세계대전 후 철천지원수였던 독일과 프랑스는 마침내 손을 맞잡고 유럽 통합의 근간이 되었다. 총칼이 만든 것은 종전이었지, 평화가 아니었다. 평화는 언제나 패배를 인정하는 용기와 용서하는 의지, 그리고 적을 지구촌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서 시작되었다.
신학자 몰트만은 말했다. 신은 강자와 승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분은 고난받는 자와 함께 고난받는 신이다. 전쟁터에서 신을 찾는다면, 그분은 승리한 깃발 위에 있지 않다. 총성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의 눈물 속에, 적에게서 끝내 인류애를 발견하려는 한 사람의 결단 안에 그분이 계신다. 전쟁을 멈추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신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기도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윤재선 목사(산천무지개교회/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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