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휴전 협상이 22일(현지시간) 저녁으로 다가온 가운데 산업계는 양측이 극적 합의를 이루더라도 공급망 복구까지 갈길이 멀다는 우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에 매설된 기뢰 제거를 비롯해 현지 정유 설비 복구 등 전쟁 이전으로 상황을 되돌리려면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정부의 원유 확보에도 불구하고 가격 부담이 커진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향후 정상화 기간 동안 전시 상황에 준하는 경영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부품업계 등 전방 산업에도 이미 도미노 가격 인상이 현실화되는 등 전쟁 여파가 스며들고 있다.
중동에서 美·남미·호주로 눈 돌려보지만…
22일 CBS노컷뉴스를 종합하면 국내 정유업체들의 비중동 국가 원유 수입량은 눈에 띄게 늘었다. 중동산 경질유를 대체하기 위한 고육지책인데, 가공과 운송 등에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이 2배 이상 늘어난 만큼 경영 부담도 덩달아 커진 상황이다.한국무역협회의 3월 원유 수입 통계를 분석한 결과, 지난달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금액은 전년 대비 75.8% 폭증했다. 봉쇄 영향권 밖인 호주(44.7%)와 말레이시아(140.5%)의 수입 금액도 눈에 띄게 늘었고, 지난해 순위권 밖이었던 에콰도르는 6위로 급부상했다.
중동에서 국내 반입까지 20일 안팎 소요됐던 것과 비교해 비중동 국가에서 원유를 수입할 경우 통상 45~60일 정도 걸린다. 정유·석유화학 업체들로서는 원가 상승뿐만 아니라 물류 효율성이 급격히 저하되는 이중고에 상당 기간 시달리게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원유값 오르니 석화업체 줄줄이 불가항력…부품 단가도 인상
원가 상승은 물론 해상 운임과 보험료까지 덩달아 오르면서 석유화학 업계는 단가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불가항력을 잇따라 선언하고 있다.여천NCC와 한화토탈에너지스 등 국내 주요 석화업체들은 에틸렌, 프로필렌, 파라자일렌 등 기초유분 생산 공정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이들 제품은 봉투나 플라스틱 용기, 주요 자동차 부품 등에 사용되는 원료인 만큼 모든 산업 분야에 걸쳐 생산 단가가 연쇄적으로 오를 거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석유화학 업체들은 최대한 빠른 정상화를 약속하고 있지만, 카타르와 바레인에 이어 쿠웨이트 국영석유공사(KPC) 등 중동 현지 공급선들이 줄줄이 가동 중단을 발표하면서 고충은 쉽사리 줄어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파장은 자동차 부품업계 등 전방산업으로 서서히 퍼지고 있다. 당장 생산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수급 상황에 차질이 빚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상당수 부품은 20~30% 가까이 가격이 인상됐다는 후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필렌 등 나프타에서 사출하는 부품들은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원재료 수급은 문제 없이 계속되더라도 단가 부담, 구매 부담은 커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기뢰 제거에 설비 복구해야…정상화까지 계속 '버티기' 모드
전쟁이 끝날 듯 말 듯 이어지면서 '비상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에 고립된 한국 선박 중 일부가 다음달 8일 충남 대산항에 입항할 예정이지만 해협 봉쇄와 개방이 반복되면서 수급 불확실성은 여전한 상황이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 1조980억원 중 절반을 나프타 수급안정지원사업에 투입해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지만, 안정적인 원유 수급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전쟁 기간 동안 매설된 기뢰를 제거한 뒤 본격적으로 상선이 통행하려면 4~6개월 가량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도 정유·석화 업계의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여기다 시설이 노후화된 카타르 등 일부 중동 국가들은 정유 설비 복구에 수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종전이 당장 내일 된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이전처럼 원유나 나프타를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유가 가격 변동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며 "경제성이 좋은 원유를 가격이 안정될 때까지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몇 년 동안 안고 가야 한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