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10년…'여성혐오 범죄'를 말하지 않는 사회

"여자라서 죽였다" 페미니즘 운동 변곡점 된 사건
10년 지난 지금도 여성 대상 강력범죄 반복
광주 여고생 살인사건 등 여성 대상 분노가 분풀이 범죄로
여성계·전문가들 "구조적 성차별 기반 폭력" 지적
여성혐오 범죄 개념 제도화 필요…동기 분석·통계 마련도

2016년 5월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건물 공중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던 20대 여성을 살해한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 일대에는 추모 포스트잇이 가득 붙었다. 연합뉴스

10년 전 이날, 2016년 5월 17일 서울 서초구의 한 노래방 빌딩 공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 김모씨가 일면식도 없던 2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했다.

당시 김씨가 경찰 조사에서 "여자라서 죽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알려지면서 '여성혐오 범죄' 논쟁이 촉발됐다. 사건 직전까지 여러 명의 남성이 화장실에 출입했지만, 뒤이어 들어 온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역시 여성을 표적으로 한 범죄라는 논쟁에 불을 붙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내가 될 수도 있었다' 등의 내용의 추모 포스트잇 수만 장이 붙었다. 많은 여성이 거리로 나와 자신이 일상에서 겪어온 공포와 폭력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이후 한국 사회 페미니즘 운동의 변곡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 대상 강력범죄는 반복되고 있다. 여성 역무원이 직장동료에게 살해당한 '신당역 살인사건', 수차례 신고에도 자신을 스토킹하던 남성에게 끝내 살해당한 '남양주 살인사건', 그리고 최근 '광주 여고생 살인사건'까지.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런 범죄를 '여성혐오 범죄'라고 명명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반복되는 여성 대상 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짚지 못한 채 여성들은 여전히 집과 직장, 거리에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다.

끝나지 않은 '강남역'의 질문

지난 1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페미연대 제공

여성혐오는 성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된 여성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뜻한다. 여성혐오 범죄는 교제폭력과 가정폭력 등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서부터 불특정 다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 묻지마 살인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한국 사회 여성들이 '나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0주기를 맞아 전국 순회 행동을 진행 중인 서울여성회 윤미영 사무처장은 "강남역 살인사건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라며 "많은 여성이 '나일 수도 있었다'는 감각을 공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10년간 낙태죄 폐지운동과 혜화역 시위, N번방 사건 대응 등 여성폭력과 관련된 주요 이슈마다 여성들이 함께 모이고 행동하는 문제의식으로도 이어졌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여성 대상 강력범죄가 성차별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3월 6일 발표한 '2025년 분노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 내 여성살해'는 최소 137명, 살인 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252명에 달했다. 일면식이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뻔한 여성은 총 92명으로 집계됐다.

가해자가 언급한 범행 이유는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나와 성관계를 해주지 않아서", "기분이 나빠서", "너무 시끄러워서" 등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가해자들은 일면식 없는 여성에게 성폭력을 시도하고 이에 저항하는 피해자에게 중대한 상해를 입히거나 생명을 빼앗았다"며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는 여성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자기 뜻대로 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는 성차별적 인식이 범죄의 바탕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광주 여고생 살인사건' 피의자 장윤기(23)씨가 지난 14일 오전 광주 서부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 광주의 한 길거리에서 1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한 '광주 여고생 살인 사건' 역시 여성혐오 범죄의 전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찰은 피의자 장윤기(23)가 특정 여성에 대한 분노를 다른 여성에게 분풀이식으로 표출한 계획범죄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이성적 호감을 표시했던 직장 동료에게 스토킹 혐의로 고소당하자 해당 여성을 찾아 배회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그 분노가 불특정 다수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여성폭력 문제를 구조적 성차별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젠더갈등으로 축소하거나 논쟁 자체를 회피해 왔다는 지적이 있다. 성평등가족부는 최근 광주 여고생 살인 사건에 대해 "여성 청소년 대상으로 한 여성폭력 사건"이라는 공식 입장을 밝혔으나, '여성혐오 범죄'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강남역 살인 사건도 당시 경찰이 조현병에 따른 범죄라는 결론을 내렸고, 여성혐오 범죄 여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윤 사무처장은 "명백하게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원인이 된 범죄임에도 이를 젠더갈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거나 성별 갈라치기를 조장해 온 정치권 등이 문제를 끊임없이 회피해 왔다"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관심은 커졌지만, 여성폭력에 대한 근본적 대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0년 사이 안티페미니즘 정서와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및 행동)가 확산되면서 여성주의 의제를 공론장에서 드러내기 어려워졌다는 해석도 있다.

'여성혐오 범죄' 제도화 시작해야

2016년 5월 21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진행된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집회. 황진환 기자

전문가들은 여성 대상 강력범죄를 단순 우발 범죄로 볼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반영된 폭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여성혐오 범죄나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살해) 개념이 법·제도적으로 명확히 정의돼 있지 않다.

현행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여성폭력을 구조적 성차별 문제로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더해 최근 성평등부는 여성폭력방지법은 정의 조항으로 '여성폭력'만을 규정하고 있어 모든 성별의 피해자를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회입법조사처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여성폭력방지법이 여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드러내기보다 '성중립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운영돼 왔다"며 "오히려 법 적용 범위를 남성 피해자까지 확대하려는 개정안이 검토되는 등 당초 입법 취지를 충분히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적 개념이 부재하다 보니 여성혐오 동기에 따른 범죄를 별도로 집계하거나 분석하는 체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허 조사관은 혐오 범죄의 특징으로 △피해자로 여성을 표적화해 범행 대상으로 삼는 점 △원한 관계 등 해를 가할 만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점 △범행 수법이 과도하게 잔혹한 점 등을 꼽았다. 그는 "수사 단계에서부터 범행 당시 언행이나 온라인 활동, 평소 혐오 표현 여부 등을 종합해 여성혐오 동기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여성혐오 범죄 개념이 제도화될 경우 수사 단계부터 범죄의 동기와 패턴을 축적·분석할 수 있고, 혐오 동기가 인정되는 범죄에 대해 가중처벌 논의도 가능해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지난해 말 페미사이드를 사실상 종신형 수준으로 가중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윤 사무처장은 "중요한 건 개별 사건을 넘어 반복되는 여성 대상 폭력의 원인을 사회가 어떻게 규정하고 대응할 것인가"라며 "여성폭력을 단순한 개인 일탈이나 우발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부터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친밀한 관계 안에서 발생한 통제와 폭력, 스토킹이 불특정 다수 여성을 향한 범죄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 역시 사회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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