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사업보국과 기업국가

연합뉴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대표적 경영 철학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었다. 사업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기업이 사적 이윤 추구를 넘어 국가 발전과 국민 경제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1938년 28살에 삼성을 창업했던 이병철 회장은 청년 시절 일본에 유학했다. 군국주의로 치닫던 당시 일본에는 모든 방면에서 국가주의가 팽배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한국 정부는 희소한 자본과 자원을 삼성 등 재벌들에게 몰아주며 국가 주도의 압축성장을 꾀하고 있었다. 국가가 기업의 목숨줄을 잡고 있던 셈이었으니,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 철학이 자연스러웠던 시대였다.
 
사업보국 철학은 삼성전자가 반도체산업 진출을 선언한 1983년 '도쿄 선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반도체는 내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이 국가를 위해 해야 할 마지막 봉사'라며 '이 나이(당시 73살)에 전 재산을 걸며 모험을 하는 이유는 오직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밝혔다.
 
삼성전자 노사의 성과급 협상이 20일 밤 극적으로 타결됐다. 대규모 피해가 예상됐던 노조 파업도 일단 피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사태는 역설적이게도 반도체 사업의 창사 이래 최대 실적에서 비롯됐다. '모험하는 심정으로 할아버지가 시작한 반도체 사업이 손자 대에서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이 대박의 과실을 나누는 문제로 이번 사태가 일어났다.
 
반도체 대박의 영향은 삼성전자 노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삼성전자 주식이 코스피 시가 총액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국민 열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삼성전자 주식을 갖고 있다. 한국 전체 수출에서 삼성전자 한 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려 20%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만 따져도 한국 전체 수출의 15% 정도나 된다. 삼성전자 노사 협상에 온 나라가 들썩인 이유다. 대통령부터 시작해 국무총리와 관련 부처 장관들까지 나서 걱정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 노사는 막판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온 국민의 따가운 시선에도 노사는 각각 '정당한 분배'와 '경영 원칙 고수'로 맞섰다. 이쯤 되면 기업이 나라에 보답한다기 보다는 '나라를 흔든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산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기업이 국가를 압도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무능하고 느린 관료 중심의 국가 체제 보다 유능하고 신속한 CEO 체제의 기업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견해도 있다.이런 시각에서 보면 국가의 임무는 기업 지원과 규제 해제로 국한된다. 더 나아가 국가가 기업 이익을 대변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석유 기업의 이익을 되찾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침공한 것이 최근의 대표적 사례다.
 
한국도 이런 '기업국가'의 피해를 실제로 받고 있다. 쿠팡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기업인 척하며 한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쿠팡은 고객 정보 유출이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한국 정부가 정당한 제재를 내리자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 정관계에 로비 자금을 쏟아붓고 '한국 정부가 중국 기업을 위해 미국 기업을 규제하고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여론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호응해 트럼프 행정부는 쿠팡 사태 등을 빌미로 한국과 안보 협의마저 몇 달 간 외면했다. 심지어 1년 이상 자리를 비워뒀던 주한미국 대사에 쿠팡 옹호론자를 임명하기까지 했다. 기업이 국경을 넘나들며 타국의 경제 주권과 안보 주권까지 흔드는 전형적인 '기업국가'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삼성전자는 이미 기업 차원을 넘어섰다. 일개 월급쟁이였던 삼성전자 직원은 이제 전문직종에 맞먹는 '최상위 계급'이 됐다. 취업 준비생에게 '신의 직장'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삼성전자 성과급 사태는 국가가 '갑'이요 기업은 '을'이어야 작동하는 사업보국 철학이 작동할 수 없는 시대임을 보여준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삼성전자 노조는 나라 경제는 물론 세계 공급망도 멈춰 세울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은연중 느꼈을 것이다. 삼성전자 사측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권력 최상층까지 자발적 우군으로 세울 수 있는 지형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기업이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기업국가 단계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점점 비대해지는 기업 권력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초과 이윤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일단 봉합됐지만 노노간 성과급 내분과 회사-주주 간 배당 갈등, 중소기업과 원하청 격차, 산업간 불균형 성장 등 많은 문제가 안팎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업과 국가의 올바른 역할을 고민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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