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신경림 시인의 2주기를 맞아 유고 산문집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가 출간됐다. 책 제목은 널리 사랑받은 시 '목계장터'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거창한 바위가 아니라 들꽃과 잔돌의 자리로 내려가려 했던 신경림 문학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책은 평생 시를 통해 자신과 시대를 함께 비추어온 시인의 산문을 모은 책이다. 엮은이는 도종환 시인이다. 도 시인은 "신경림 선생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 곧 우리 문학이 고뇌하며 걸어온 길"이라고 적었다. 일제강점기, 전쟁, 군사독재,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간을 온몸으로 지나온 한 시인의 삶이 한국 현대문학의 길과 겹쳐 있다는 뜻이다.
책의 첫머리에서 신경림은 시를 쓰는 일에 대한 오래된 회의를 고백한다. 그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맑고 깨끗한 서정시를 쓰는 일이, 남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나 혼자만 제멋에 취해 살고 있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묻는다. 시가 개인의 감상에 머물러도 되는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한 흔적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구호만을 문학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 성찰이 없는 시가 아무리 옳은 소리만 골라 한다 해도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되, 개인의 사유와 정서가 빠진 시 역시 문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신경림 시가 민중과 현실을 말하면서도 오래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문집에는 시인의 문학적 여정도 담겼다. 등단작 '갈대' 이후 방황을 거쳐 '농무'에 이르기까지, 신경림은 자신의 시를 끊임없이 바꾸고 갱신하려 했다. 그는 "내가 시를 쓰는 일은 늘 내 시로부터 도망치는 일의 반복이었다"고 쓴다. 그러나 그 도망은 완벽할 수 없었다. 자신이 뿌리박은 땅과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도 깊다. 남한강을 두고 그는 "강은 마을과 마을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이어주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강은 그에게 길이자 학교였다. 강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웠다는 고백은, 신경림 문학이 낮은 곳의 사람들과 어떻게 이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말년의 산문은 오늘의 사회를 향한 당부로도 읽힌다. 신경림은 빈부 격차, 마구잡이 개발, 남북 대립을 걱정하며 "가장 낮은 자세가 되어 상대를 높이면서, 상대를 존중하면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혐오와 불신이 깊어진 시대에 이 문장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는 신경림 시인의 마지막 산문집이자 마지막 목소리다.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았던 시인의 문장은, 상실과 불안의 시간을 지나는 독자들에게 조용한 위로와 삶의 이정표를 건넨다.
신경림 지음 | 도종환 엮음 |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