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HD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조합이 2017년 원청을 상대로 낸 단체교섭 청구 소송에서 원청의 손을 들어줬다.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도 사용자로 보는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 2·3조)이 올해 3월 시행됐지만, 법 시행 이전 사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원청의 사용자성'을 부정하고 기존 판례를 유지한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21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가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낸 단체교섭 청구 소송에서 하청 노조의 상고를 기각했다.
쟁점은 원청을 하청 노조의 단체교섭 상대방인 '사용자'로 볼 수 있느냐였다. 노동조합법상 단체교섭 의무는 원칙적으로 근로계약의 당사자, 즉 직접 고용 관계에 있는 사용자에게만 인정된다. 원청과 하청 노동자 사이에는 그런 직접 계약이 없다는 게 종래 법원의 입장이었다.
다수의견을 낸 8인의 대법관은 "구 노동조합법 2조가 적용되는 이 사안에서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하는 사용자'에 관한 기존 법리는 타당하므로 유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1986년 이래 확립된 판례, 즉 사용자를 '근로자와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을 맺고 임금을 지급하는 자'로 보는 기준을 그대로 견지한 것이다.
다수의견은 또 "원청이 하청노조에 대해 지배·개입하지 않을 의무 등 소극적 의무를 부담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단체협약의 체결을 위해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까지 부담한다고 해석하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의 정의를 확장한 법이다. 기존에는 직접 근로계약을 맺은 상대방만 사용자로 봤지만, 개정법은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사용자로 인정한다. 하청·파견 등 간접고용 구조에서 실질적 권한을 가진 원청에게도 단체교섭 의무를 부과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2016~2017년에 제기된 것으로 노란봉투법 시행 이전에 해당한다. 대법원 다수의견은 "구 노동조합법이 적용되는 2016년경의 단체교섭 사안에 관해 종전 법리를 변경해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 규정과 실질적으로 유사한 내용의 법리를 창설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개정법 적용 사안부터 새 기준을 적용하면 충분하다는 논리다.
다만 이흥구·오경미·신숙희·마용주 대법관은 종전 판례를 변경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이 없더라도,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면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고 밝혔다.
소수의견은 헌법이 직접 노동 3권을 보장하는 취지, 1990년대 이후 급속히 확산된 외주화·간접고용의 현실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이 새로운 유형의 노무제공 관계에서 노동 3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법리를 발전시켜온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하청 노조는 2016년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2017년 1월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모두 원청의 교섭 의무를 부정했고, 이에 하청노조가 불복하면서 대법원은 2018년 12월부터 사건을 심리해왔다.
판결 직후 금속노조는 "하청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한 판결"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개정 노동조합법의 취지에 역행하는 결정으로, 대법원이 시대적 요구와 노동 현장의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비판이다.
반면 HD현대중공업 측은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향후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개정법이 적용되는 사안에서는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될 여지가 열린 만큼, 원·하청 간 단체교섭을 둘러싼 법적 다툼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