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시작하는 사람은 저자일지 모르지만, 소설을 끝내는 사람은 독자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배우이자 소설가인 차인표가 27일 서울시 중구 정동에서 열린 장편소설 '우리동네 도서관'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신작 집필의 출발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2024년 1월부터 올해 5월 초까지 약 1년 6개월에 걸쳐 썼다며, 처음에는 '용'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차인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용을 너무나 자세히 알고 있는데, 정작 직접 본 사람은 없다"며 "어떻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를 모두가 알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그러다 집필 과정에서 자신이 소설을 계속 쓰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게 됐고, 결국 "제 소설을 읽고 각자의 고유한 해석을 덧입혀주는 독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우리동네 도서관'은 매일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해 소설을 쓰는 작가 '나'와, 그가 구상하는 고구려 화공 '번각'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작품이다. 번각은 자신이 직접 본 것 외에는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인물이지만, 목숨을 볼모로 귀족의 묘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고, 그 안에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용'을 반드시 넣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차인표는 고구려 시점을 택한 이유에 대해 "처음부터 고구려와 현대를 오가며 쓰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며 "우리 선조들도 용에 대해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고, 신화나 전설, 벽화와 유물 안에 후대에 전달하는 메시지를 넣어놓지 않았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덕흥리 고구려 고분 천장에 그려진 용의 이미지에서 상상력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작품 속 용은 단순한 환상적 존재가 아니다. 극심한 가뭄 속 "비가 내려야 한다"는 간절함,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망,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끝내 기록하려는 욕망이 용의 형상에 겹친다. 소설은 "부서진 흙바닥, 타버린 곡식, 황폐한 밭"의 절망과 함께, 존재의 실체를 증명하지 못해도 믿고 기록해야 하는 인간의 마음을 좇는다.
현대의 작가 '나' 앞에도 용이 나타난다. 그러나 용은 영감을 주기보다 작가의 한계를 찌른다. "없는 걸 억지로 만들어 내려니까 머리가 아픈 거야"라는 속삭임은 창작자의 불안과 욕망을 드러낸다.
차인표는 "소설과 에세이를 오가고, 소설 속에 그 소설을 쓰는 과정이 함께 담긴 점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차이"라며 "의도한 것은 아닌데, 김종회 문화평론가께서 '메타소설'이라 평가를 해주셔서 그 장르를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기자간담회에서는 배우로서의 경험이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도 언급됐다. 차인표는 "30년 넘게 대본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소설을 쓸 때도 시각화를 먼저 염두에 두는 것 같다"며 "풀샷이 먼저 나오고, 이 세계를 설명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라고 했다.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두고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영향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품에서 차인표가 가장 오래 머문 자리는 '독자'다. 그는 그동안 북콘서트에서 만난 독자들을 떠올리며 "한 분 한 분이 저와 똑같이 소중한 인격체이고, 희로애락을 갖고 있었다"며 "그분들이 내가 책을 쓰게 해주는 소중한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내 상상력조차 누군가가 남겨놓은 흔적이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그 인식은 작품 속 문장으로도 이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쓰는 일이었다. 생각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는 대목처럼, 소설은 쓰는 이와 읽는 이가 서로의 존재를 붙드는 관계를 말한다.
차인표는 제목을 '우리동네 도서관'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돌아보니 삶의 절반 이상을 동네에서 보내고 있더라"며 "도서관에서 글을 쓰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같이 사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지인들을 힘들게 떠나보낸 기억들을 떠올리며 "같이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래서 함께 살고 있는 공간인 '우리동네 도서관' 말고는 다른 제목을 생각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차인표는 2009년 '잘가요 언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오늘 예보', '인어 사냥', '그들의 하루' 등을 발표했다. '잘가요 언덕'의 개정판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영국 옥스퍼드대 한국학 필수 교재로 선정됐고, 그는 2025년 황순원문학상과 손호연 평화문학상을 받았다. 오는 7월에는 한국 초연 '죽은 시인의 사회' 연극 무대에도 오르며 배우 33년차, 작가 17년차를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