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탈북인' 3인, 다시 '국적판정' 나선다…"하나님 부디"

한자리 모인 재북 화교 후손 '유령 탈북인' 3인
CBS 보도 이후 법률전문가 등 도움의 손길
전문가들과 법무부 '국적판정' 절차 신청 검토
"희망 잃지 않겠다…떳떳하게 살고 싶어"

김천일(왼쪽부터), 전경수, 윤성화(가명)씨가 지난 2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사무실에서 법률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송선교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단독]20년 전 '처치곤란 유명인'은 잔반통 뒤지는 노숙인이 됐다
②미국도 '탈북자' 인정했는데…엄마는 '불체자'로 세상 등졌다
③"난 중국말도 못 하는 북한 사람"…난민도 안 되는 '유령'들
④[단독]법무부 '유령 탈북인' 연구용역도 맡겼지만…여전히 방치
'유령 탈북인' 3인, 국적 찾아 나선다…"하나님 부디"

"거의 못 만났죠. 각자 먹고살기 바쁘니까요. 천일 형님은 한 7년 만인 거 같네요."

2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사무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한 남성이 회의실에 홀로 앉아 주뼛대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얼마 전 끝내 국적을 얻지 못한 채 불법체류자 신세로 세상을 떠난 탈북자 모친의 장례를 치른 전경수(51)씨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다른 남성이 들어섰다. 심장병을 앓고 있지만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윤성화(64·가명)씨다. 경수씨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하며 "오래간만이다", "건강은 좀 어떠냐"며 안부를 묻는 말에는 어색한 북한 말투가 묻어 났다. 두 사람은 5년 전 난민 신청을 함께했던 인연이 있다.

밝은 표정으로 서로 안부를 묻는 무국적 '유령 탈북인'들. 이원석 기자
이어서 또 한 명의 남성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월 서울 강동구 길동 인근 길거리를 배회하며 노숙하다 현재는 경기도 광명의 한 교회에서 보호받고 있는 김천일(63)씨다.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이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 "힘든 일 많았던데 괜찮냐"며 천일씨를 반겼다. 오랜만에 보는 탓에 어색한 기류도 있었지만 사무실 안은 금세 북한식 억양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이날 한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모두 무국적 신분의 '유령 탈북인'들이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재북 화교 혈통의 후손이란 이유로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떠날 수도 없는 '불청객'처럼 살아가고 있다. 같은 처지끼리 서로 의지할 만도 하지만 정작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무국적자로 겨우 살아가는 삶은 안부를 챙기기조차 버거울 만큼 팍팍했다.

전경수씨가 일하는 서울 중구 한 시장 내 비닐 도매업체의 창고. 이원석 기자
서울의 한 비닐 도매업체에서 창고 관리와 배달일을 하는 경수씨는 거의 쉬는 날 없이 일한다. "체류 자격(F-1) 때문에 일을 줄 수 없다"며 번번이 거절당하기를 수십 차례, 감사히도 채용해 주겠다는 현재의 업체를 만나 혹여나 폐가 될까 늘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지난 3월 노숙인 생활을 끝낸 천일씨는 최근 일자리를 얻기 위해 곳곳을 다니고 있지만 가는 곳마다 난색을 표해 아직 무직 상태다. 성화씨는 요즘 부쩍 건강이 더 안 좋아져 꼼짝없이 집에만 있을 때가 많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리가 마련된 건 이들이 십수년간 반포기 상태였던 일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기 위해서다. 바로 국적을 찾는 일. 지난 13일부터 보도된 CBS노컷뉴스의 '유령이 된 탈북자들' 연속 기획 이후 "돕고 싶다"는 법률전문가 등의 따뜻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세 '유령 탈북인'들의 외국인등록증. 국적란에 'STATELESS'(국적 없음)라고 적혔다. 송선교·박수연 기자
이날 세 사람은 법률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이제라도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전문가들도 국가가 유령 탈북인들의 복잡한 배경이나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적, 국가적 특수성 등을 고려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방치해온 데에 아쉬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이들을 추방하는 등 국적을 확인해주지 않고, 세 사람 모두 부모 중 북한 혈통이 있거나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는 점, 또 이로 인해 출생 때는 북한 주민임을 증명하는 출생증을 받았고 실질적으로 북한 사람으로 살았던 점 등에 주목했다.

전문가들은 우선 법무부에 '국적판정'을 신청해 이들의 한국 국적 보유 여부를 다시 따져볼 여지가 있다고 봤다. 국적판정은 대한민국 국적 보유 여부를 법무부에 판단을 구하는 절차다. 우리 국적법은 '출생 당시에 부 또는 모가 대한민국 국민인 자는 출생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규정하며 헌법 제3조(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에 따라 북한 주민은 우리 국민으로 여겨진다. 전문가들은 세 사람의 진술과 여러 자료를 통해 이들의 국적판정 절차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계획이다.

이날 얘기를 나누는 세 유령 탈북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석 달 전 취재진과 처음 마주했을 때 극도로 경계하던 눈빛과는 달라져 있었다. 경수씨는 "지금까지 도와주겠다는 언론이나 변호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부분 얘기를 듣고 나면 '도와주기 어려울 것 같다'고 태도를 바꿨다"며 "언제부턴가 다 포기하고 불신부터 들었던 게 사실이지만 이번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아 보려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과정이 어렵고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말을 들은 성화씨는 "죽기 전에 국적이란 걸 갖고 싶은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진심으로 손 내밀어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길거리에서 자포자기 상태로 방황했던 천일씨도 "의지를 갖고 힘을 내보고 싶다"며 "당장 국적이 없더라도 직업을 얼른 구해서 열심히 한번 살아볼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 유령 탈북인들. 이원석 기자
'국적이 생기면 어떨 것 같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경수씨는 "언제부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면서도 "그저 떳떳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라고 했다. 성화씨는 "국적도 없이 초라해서 그동안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에게 연락해 볼 생각도 못 했다. 만약 그런 일이 이뤄지면 먼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천일씨는 "매일 눈을 뜰 때마다 느끼는 두려움이 사라지면 좋겠다"고 바람을 말했다.

이날 만남에는 천일씨를 보호하고 있는 열방선교교회의 한기태 목사가 함께 자리했다. 세 사람은 현재 각각 교회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며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다. 한 목사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청했다. 한 목사가 "하나님 부디 오랫동안 이 땅에서 소외됐던 이들의 국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은혜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하자 세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한 목사의 기도가 끝나자 회의실은 잠시 조용해졌다. 세 사람은 다시 일터와 각자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들은 오래도록 혼자였고, 그게 익숙하다고 했다. "그래도 이젠 외롭진 않네요." 셋 중 누군가 말했다. 다른 이들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도전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또 그 끝에 어떤 결론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누구도 알기 어렵다. 세 명의 유령 탈북인들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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