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경고 묵살하고 대형 사고 낸 선관위

연합뉴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가 사고를 쳤다.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쳤다. 3일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투표 용지가 모자라 일부 유권자들이 재대로 투표하지 못하는 사상 초유의 사고가 터졌다. 투표 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곳은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 광진구 등의 14개 투표소라고 중앙선관위는 밝혔다. 송파구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 용지가 도착하지 않아 이날 밤 10시까지도 투표를 마치지 못했다. 유권자 일부는 장시간 대기에 지쳐 투표를 포기하고 귀가하기도 했다.
 
이번 사고는 명백한 투표권 침해다. 국민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해야 할 선관위가 오히려 투표권을 침해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대형 사고는 늘 징조를 보인다. 크고 작은 '일'들이 미리 터진다. 이번 사고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 있었던 지방 선거 사전 투표에서 다른 이의 신분증으로 투표했던 사례가 발생했지만 선관위는 걸러내지 못했다. 중대한 선거법 위반 사안인데도 선관위는 '외모와 주소지가 비슷해 적발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선거 사무의 기본 중의 기본인 '본인 확인'조차 게을리 한 것이다. 본보는 지난 2일자 칼럼을 통해 이런 점을 지적하고 '본 투표 때에는 사소한 실수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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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또 지난 2022년 대선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 투표지를 정규 투표함 대신 쇼핑백 등에 담아 이송해 선거 공정성 문제를 자초했다.
 
지난 해 대선에서도 한 사전 투표소에서 유권자가 투표 용지를 받은 뒤 투표소 밖으로 나가 식사까지 하고 돌아온 사실이 전해져 선관위가 사과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근 들어 선관위의 선거 부실 관리 사례가 이어졌는데도 선관위는 긴장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투표 용지 부족이라는 헌정사 초유의 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번 사고는 선관위의 안이한 업무 태도에서 비롯됐다. 송파구 전체 유권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정도만 투표 용지를 인쇄하는 바람에 발생했다. 투표율이 낮을 것으로 예상해 이 정도만 준비했다는 게 선관위 설명이다. 투표율은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거니와 50%로 예측한 과학적 근거도 없다. 혹시 모를 투표 용지 부족 사태에 대한 대비책도 작동하지 않았다. 이번 지방 선거가 진영 간 대결 양상을 보이며 사전 투표율이 급상승하는 등 투표율 상승 조짐을 강하게 보였지만 선관위는 손을 놓고 있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3일 밤 기자회견을 마치고 중앙선관위원회로 향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이번 사고는 정치적 참사다. 열세가 전망돼온 국민의힘은 자신들의 강세 지역인 송파구와 강남구 등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자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법적 소송 방침까지 밝혔다. 물론 서울시장 선거가 당초 예상과 달리 자당 후보의 승리로 결론 나면서 실제로 선거 무효 소송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패배한 후보들이 개별적으로 무효 소송에 나설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울러 투표권이 침해된 유권자들이 헌법 소원을 낼 가능성도  여전하다.
 
선관위의 부실 관리는 부정 선거 주장에 기름을 부어줄 것으로 보인다. 전한길과 미국인 모스탄 등 극우 세력들이 3일 밤 중앙선관위로 몰려들어 부정선거를 중단하라며 밤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 사고는 또 '윤어게인' 세력에게도 다시 한번  확신을 줄 것이다. 국회와 함께 중앙선관위를 '문제의 기관'으로 콕 집어 계엄을 일으켰던 윤석열의 '선견지명(?)'에 탄복하며 활동력을 높일 것이다. 박근혜, 이명박에 이어 윤석열까지 선거판에서 대면하게 되는 끔찍한 미래가 올 수도 있다.
 
이번 사태의 진상이 철저히 규명돼야 한다. 중앙선관위가 자체 조사 방침을 밝혔지만 외부 조사가 절실하다. 감사든 국정조사든 외부 기관이 조사해야 한다. 선관위는 신뢰를 이미 잃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에 따라 엄정한 문책도 뒤따라야 한다. 필요할 경우 형사 책임도 물어야 한다. 사회적 참사와 산업 재해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책임을 묻듯이 이번 정치적 참사에 대해서도  선관위에게 책임을 강력하게 물어야 한다.
 
아울러 법관들이 각급 선관위 조직의 수장으로 임명되는 비상근 체제와 독립적 헌법 기관이라는 지위가 주는 무사안일의 조직 문화도 손볼 때다.

개혁 수준으로 까지 선관위를 손봐야 하지만 정부 차원의  관여나 개입은 극히 신중해야 한다. 선관위를 독립적 헌법 기관으로 두고 위원장에 형식적으로나마 법관을 임명한 이유는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정부나 정치권이 선관위 개혁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 선관위에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를 남겨둘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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