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20년 전 영화 '타짜'의 한 장면으로 거슬러 가보자. 아귀가 고니의 밑장빼기 속임수를 잡아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의 손목을 낚아채며 일갈한다. "너는 첫 판부터 장난질이냐?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여?" 그러자 고니는 "증거 있어?"라고 응수했고, 이에 아귀는 "증거? 증거 있지! 너는 내게 구땡을 줬을 것이여. 그리고 정마담한테 장땡을 줘서 이 판을 끝내겠다, 이거 아니여?" 결국 영화는 한 수 위인 고니에게 아귀가 손목을 날리고 '불나비 사랑'이 울려 퍼지며 막을 내린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웬 영화 '타짜' 타령을 읊어대는지 눈치챈 분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치러진 선거 가운데 이번 전북도지사를 뽑는 과정처럼 드라마틱하고 반전이 거듭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끈 적은 드물었다. 이런 가운데 드라마의 서사를 이끌어 온 단어를 꼽으라면 필자는 바로 영화 '타짜'의 '빙다리 핫바지'를 꼽고 싶다. 이번 전북도지사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민심의 서사를 이보다 잘 대변할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결과는 더불어민주당 이원택 후보의 당선으로 끝이 났지만, 선거 과정에서 요동친 바닥 민심은 거대 정당의 오만함에 호된 경고장을 날렸다고 본다.
그동안 전북도민들은 지독할 정도로 일편단심이었다. 젊은 세대의 유행어인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전북은 '얼죽민(얼어 죽어도 민주당)'이었다. 선거철마다 "전북 발전을 위해 표를 몰아달라"는 외침이 뻔한 레토릭임을 알면서도 밀어줬던 것은, 그것이 내 고향 전북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던 도민들의 눈물겨운 의리였다. 그러나 그토록 품을 내주며 아낌없이 사랑했건만, 돌아온 전북도민들에게 찾아든 성적표는 중앙 정치무대 속 '소외와 낙후 1번지'라는 자조감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 국가 주도 초대형 국책사업이 40년 가까이 진행됐는데도 진척률(매립률)이 겨우 절반에 그친 곳이 있단 말인가! 수십 년 동안 삽질만 반복하며 먼지만 날리는 새만금은 주류 정당이 전북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박제였다.
그렇기에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표심은 민주당에 결코 승리의 훈장이 될 수 없다. 과거 같으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던 전북이었다. 민주당 공천이 곧 당선 공식이던 시절, 압도적 차이로 당선승을 거머쥐었던 때와 비교하면 9%포인트라는 한 자릿수 표차의 성적표는 민주당으로서도 결코 웃을 수 없는, 등골이 오싹한 결과일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당 대표가 선택하고 당이 밀어주는 후보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찍으라"는 오만에 전북도민 상당수가 기표소 안에서 '헤어질 결심'을 내린 것으로 해석된다. 이제 더 이상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지지를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당을 향해 도민들이 만만한 '빙다리 핫바지'가 아님을 보여 준 민심의 분출이었다.
특히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불공정 논란과 더불어, 선거를 앞두고 전북을 방문해 "전북이 발전하려면 민주당을 찍어야 한다"는 정청래 대표의 발언은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40년 동안 표를 몰아줬는데도 따라붙은 것은 '낙후 1번지'라는 꼬리표인데, 또다시 민주당을 찍어야 발전한다고? 여기에 전북 도민들이 "그렇다면 그토록 표를 몰아줬는데 그동안 도대체 한 게 뭐냐?"며 반문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비록 조직력과 관성이 작동해 이원택 후보가 당선되었지만, 전북은 이제 가만히 두어도 그물에 걸려들던 '잡은 물고기'의 시대는 끝났다. 전북이 더 이상 특정 정당의 볼모가 아니며, 언제든 판을 뒤엎을 수 있는 무서운 유권자들이 사는 곳임을 선언한 것이다. 앞으로 민주당은 방심하면 그물을 찢고 달아나는 날쌘 '유선형 물고기'로 전북을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민주당이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북도민들에게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부르려거든, 이제는 달달한 립서비스가 아닌, 확실하고 묵직한 카드를 들고나와야 한다. 그 카드의 시작은 단연 '새만금'이다. 40년 가까이 밑그림만 그려놓고 방치해 둔 새만금 풍경화에 이제는 진짜 색을 칠할 구체적인 물감을 들고 와야 한다.
여기에 더해 도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인구소멸을 막아내는 생존과 직결된 패키지 인프라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첨단 미래 산업과 글로벌 기업 유치를 통해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여기에 대학을 비롯한 교육기관의 대대적인 혁신과 정주 여건인 의료 인프라까지 촘촘하게 채워 넣어야 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요구를 쏟아낸다고? 자, 전북의 현실을 한 번 직시하시라! 그동안 너무도 지속적이고 처참하게 낙후되어 왔다는 사실을… 40년간 쌓인 소외와 정체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지금 도민들의 요구는 지극히 정당한 권리 주장이다.
오만했던 민주당에 매서운 경고장을 날린 전북도민들은 이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턱밑까지 쫓아왔던 무소속의 추격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을 민주당이 과연 어떤 '물감과 카드'로 전북의 성난 민심을 달랠지, 아니면 당선증의 단맛에 취해 또다시 어망 속 물고기 취급을 할지를…
간신히 살아 돌아온 민주당의 당선증은 승리의 훈장이 아니다. 전북도민들이 건넨 마지막 옐로카드에 가깝다. 민주당이 그것을 축하장으로 착각하는 순간, 다음 선거에서 전북 민심은 기꺼이 레드카드를 꺼내 들 것이다. 명심하시라! 비록 선거는 끝났지만, 약발 떨어진 맹목적 의리 대신 생존을 목전에 두고서 매의 눈빛을 띤 전북도민들의 심판은 이제 막 시작됐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