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봄, 우리 석리마을은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겪었습니다.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영덕까지 번져왔고, 마을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주민들은 방파제와 바다로 몸을 피하며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집과 배, 삶의 터전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아온 집과 평생 모은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졌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마음속 희망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산불 이후 우리는 열 평 남짓한 임시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복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이 상실감과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이제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우리 마을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이장인 저에게 묻곤 합니다.
석리는 원래도 작은 어촌마을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일흔이 되어도 젊은이에 속할 정도로 고령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산불은 그런 마을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신규 원전 추진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석리는 과거 천지 원전 예정지였던 곳입니다. 10년 넘게 기대와 갈등을 함께 겪었고, 결국 사업이 백지화되는 아픔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소식은 단순히 원전 하나를 유치하자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주민들에게 "이제 우리도 다시 살아볼 길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은 오랜만에 웃었습니다. 어떤 분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고, 어떤 분은 "정말이냐"고 되물었습니다. 제가 언론 인터뷰에서 "주민들이 좋아서 춤을 덩실덩실 추더라"고 말한 것도 바로 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원전이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산불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하던 주민들이 다시 미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침체돼 있던 마을에 다시 희망이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신규원전이 건설된다면 많은 주민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평생 살아온 마을을 떠나는 일이 결코 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과 추억이 담긴 고향은 돈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 마을 형편이 너무 어렵고, 산불까지 겹치면서 불안과 걱정은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르신들이 저를 붙잡고 "이장님, 우리 마을 이제 우짜노" 하시며 한숨을 쉬십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우리 석리 사람들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들 아입니더"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발전소 하나가 아닙니다.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마을, 자식들이 다시 고향을 찾을 수 있는 마을, 손주들이 뛰어놀 수 있는 마을입니다. 만약 신규 원전이 추진된다면 석리는 새로운 터전에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산불로 한 번 무너진 마을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시 살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주민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곧 신규 원전 후보 부지 선정 결과가 발표된다고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국가가 영덕과 석리의 현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산불로 큰 상처를 입은 지역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석리는 지금 단순히 원전을 유치하려는 마을이 아닙니다.
산불의 상처를 딛고 다시 살아보려는 마을입니다. 집은 불에 탔지만 우리 마음속 희망까지 불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석리도 다시 한번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