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공동성명이 불러온 대외 관계의 지정학적 부메랑
지난 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발표된 한·유럽연합(EU) 정상회담 공동성명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위태로운 대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성명에 명시된 '러시아와 북한 간의 불법적 군사협력 강력 규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북한의 지원 규탄',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하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 불가', 그리고 '북한 인권 상황의 실질적 개선 촉구' 등은 북측이 체제 존엄과 직결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안들이다.
정부 당국은 이번 성명이 기존의 한반도 긴장 완화 기조와 모순되지 않으며 한국 정부의 기존 입장 범위 내라고 강변하지만, 이는 국제정치의 다변화된 역학을 오판한 안이한 변명에 불과하다. 표현의 수위가 우려를 넘어 '규탄'으로 격상된 순간, 대한민국은 유럽의 지정학적 갈등에 깊숙이 연루되었다. 이는 향후 대러 관계의 경색과 남북 관계의 극단적 단절이라는 심각한 지정학적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실용주의적 '평화 외교' 실종과 구조적 경직성
현 정부는 출범 초기 남북 대화와 실리 외교를 강조했던 공언과 달리, 실제 행보에서는 전략적 유연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 이어 지난 3월 제61차 유엔 인권이사회(UNHRC)까지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차례나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며 남북 간의 긴장을 자초했다. 여기에 한미연합훈련의 강도와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면서, 결과적으로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을 고착화하고 대남 강경 노선을 이어갈 명분만 제공하는 꼴이 되었다.이는 과거 보수 진영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남북미 정상회담 성사와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거시적 국익을 위해 인권결의안 참여를 전략적으로 보류하거나 연합훈련을 유연하게 축소 연기 조정했던 문재인 정부의 실용주의적 접근법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실용외교는 가치지향적 당위성을 과시하는 장이 아니라,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고도의 현실 정치이자 국익 극대화의 수단이어야 한다.
미·북 관계의 패러다임 변화와 서구 편향 외교의 한계
국제사회가 이미 북한을 실질적인 핵 능력을 보유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며, 이에 따라 외교적 대화와 협상을 통한 현실적인 비핵화 및 확산 방지 노선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 특히 미국 정치권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역시 미·북 대화 재개와 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리적 협상 카드로 북한의 실질적 핵 능력을 전제한 접근법을 시사하는 언급들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글로벌 차원의 외교적 유연성이 요구되는 전환기적 국면에서, 우리 정부가 서구권 중심의 고립주의적 규탄 성명에 굳이 앞장서서 동참하는 유연성 부족은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미국의 피스메이커(Peacemaker) 역할을 지원하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대화의 통로를 스스로 차단하는 현 행보는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가 아니라 방향성을 잃은 표류 외교에 가깝다.
경제 지표의 착시와 상존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재 대한민국의 주가와 일부 수출 지표는 표면적으로 온기를 띠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내실을 들여다보면 고유가, 고물가, 고환율의 '3고(高) 현상'과 자산 양극화로 인해 민생 경제의 기초체력은 심각하게 저하되어 있다. 경제학의 오랜 격언처럼 경제는 심리이며, 그 심리의 바탕에는 국가적 안정성과 안보 신뢰도가 자리 잡고 있다.북한이 대한민국을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고 접경 지역의 군사적 긴장감을 상시화한다면, 지정학적 리스크(Korea Discount)는 언제든 재점화될 수 있다. 안보 평화가 담보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일시적인 경제 지표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정부가 가시적인 지표의 착시에 취해 있거나 국내 정치적 셈법으로 대북 강경책을 고수한다면 국가 경제의 지속가능성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다.
거버넌스 개편과 인적 쇄신을 통한 평화 외교의 재건
결과적으로 현 정부의 외교부와 안보실의 행보는 과거 대결 일변도였던 전임 정권의 외교 노선과 구조적인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공언했던 '한반도 평화와 국익 중심 외교'가 한낱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실패한 강경 노선을 폐기하고 전면적인 외교·안보 라인의 인적 쇄신을 단행해야 한다.외교 관료 출신 안보실 위주의 폐쇄적 구조가 지속되면서 새롭고 창의적인 전략 없이 기존의 편향적 관성외교에 머문다면, 외교부에 집중된 한반도 평화 외교 기능을 통일부로 분산·이관하는 과감한 거버넌스 개편까지도 검토해야 한다. 즉, 외교·안보 파트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교체와 조직 혁신이 절실한 시점이다.
외교·안보 라인뿐만 아니라 나아가 집권여당 당대표를 포함한 정권 지도부 전체가 영구적인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미 관계 정상화를 향한 역사적 사명감과 전략적 비전을 갖춘 인재들로 신속하게 재편되어야 한다.
평화가 곧 경제이며, 평화야말로 국익 중심 실용 외교의 본질이자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 동력이기 때문이다. 문을 걸어 잠그는 '규탄 외교'에서 문을 열어젖히는 '평화 외교'로의 대전환, 그것만이 지금 대한민국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국익 외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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