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는 체중의 평균 2%를 차지하지만 에너지 소모량은 전체의 20%를 차지한다고 한다. 뇌는 인체의 다른 어떤 장기보다 에너지 소비량이 높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는데, 뇌도 예외는 아니다. 1984년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수전 피스크와 셸리 테일러는 '인지적 구두쇠' 이론을 발표했다. 인간은 어떤 문제를 접하면 그 인과 관계 등을 따져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기 보다는 직관이나 경험 등을 이용해 '빠른 생각'을 함으로써 인지적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 한다는 이론이다. 이렇게 해서 줄인 에너지는 생존에 필요한 다른 문제에 쓰인다.
인지적 구두쇠 이론은 현실 정치의 여러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로도 쓰인다.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이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도 오히려 지지를 받는 확증 편향은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인지부조화 상태를 회피하기 위한 '구두쇠적' 본능으로 분석된다. 또한 과거의 큰 과오는 잊어버리고 현재의 사소한 잘못이나 미래의 이익에 더 주목하는 정치적 망각 현상도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난 12일 법원은 윤석열에 대해 의미있는 판결을 또 한번 내렸다. 평양 무인기 침투 사건과 관련해 윤석열에게 일반이적죄를 적용, 징역 30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윤석열 일당이 계엄의 명분을 만들 목적으로 북한의 도발을 유도하기 위해 지난 2024년 10월 평양에 무인기를 보냈다는 내란 특검의 공소 사실을 대부분 인정했다. 그러면서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권한을 사적으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대응 도발을 했다면 국가와 국민에게 큰 피해를 끼쳤을 것인만큼 예방 차원에서라도 엄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검의 구형량과 같은 징역형을 윤석열에게 선고했다. 전현직을 막론하고 대통령에게 이적죄가 인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판결은 또 윤석열 일당의 계엄 결심이 계엄 이틀 전인 2024년 12월 1일에야 이뤄졌다는 지귀연 재판부의 판단과도 다른 것이다. 지귀연 재판부가 윤의 계엄을 '즉흥적'이라고 봤다면 이번 재판부는 계획적으로 판단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도 이번 재판은 국민과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같은 날 있었던 체코와의 월드컵 1차전 역전 승리 소식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월드컵 영향 만은 아닌 듯하다. 윤석열의 12·3 내란 계엄에 대한 대중들의 인지적 구두쇠 본능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월드컵 개최 직전에 치러진 6·3 지방 선거 결과를 보면 망각이라는 인지적 구두쇠 현상이 뚜렷하다. '계엄은 1년도 더 지났잖아요' '이번 선거에서는 내란 종식보다 부동산 정책을 보고 투표했어요' 지방 선거 뒤 여러 언론이 전한 유권자들의 표심은 이러했다.
집단의 기억은 사회적이다. 사회적 분위기와 주력 구성원이 바뀌면 집단의 기억도 변하거나 변질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 부패와 부정 선거를 일삼다가 국민에 의해 쫒겨난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여지고 유신 독재의 '야수'로 불렸던 박정희가 경제 발전의 지도자로 칭송받는다.
집단적 망각이나 기억의 변질은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낳을 수 있다. 인간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인지적 구두쇠 본능이 역사적 퇴화를 부르는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