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25일 서울국제도서전 주빈국 프랑스관에서 열린 신작 장편소설 '영혼의 왈츠' 1·2권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기억'과 '기록'으로 압축했다.
'영혼의 왈츠'는 죽음 이후의 세계와 전생, 기억, 자유의지를 소재로 문명의 기원부터 종말까지 12만 년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장편소설이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머니의 경고를 들은 주인공 외제니 톨레다노는 파국을 막을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여러 전생 속으로 들어간다. 선사시대에서 수메르와 고대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는 시간을 오가며 인류가 문명을 세우고 무너뜨린 순간들을 마주한다.
역사학도인 외제니는 기록으로 배운 역사와 전생에서 체험한 사건 사이의 간극을 발견한다. 불과 문자, 장례 의식과 도서관처럼 문명을 지탱해 온 발견을 만나는 한편, 어렵게 축적된 지식이 권력과 전쟁에 의해 파괴되고 패자의 삶이 역사에서 지워지는 과정도 목격한다.
베르베르는 "역사책에서 읽는 것과 실제로 일어난 일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 있다"며 "역사의 기록은 정권이나 지배자의 관점에서 쓰이기도 하고, 전쟁에서 패한 문명은 흔적조차 사라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군사적으로 패했다고 해서 그 문명이 덜 지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오히려 덜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승자의 기록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의 시선을 소설로 복원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소설 속 첫 전생은 네안데르탈인의 삶에서 시작한다. 베르베르는 오랫동안 원시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묘사돼 온 네안데르탈인을 죽은 이를 매장하고 이야기를 기록하며 영성을 키운 존재로 새롭게 그려낸다.
외제니의 전생 가운데 하나인 '엄지'는 부족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고, 그 기록을 안전하게 보존할 공간을 만든다. 고고학적 소재 위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문자와 장례, 기록의 기원을 재구성한 장면이다.
베르베르는 네안데르탈인의 매장 흔적과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 남은 네안데르탈인의 자취를 언급하며 "더 평화롭고 영적인 존재였을 수 있는 이들의 관점이 역사에서 잊힌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수적으로 우세했던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밀어냈다는 구도를 통해, 승리한 집단이 반드시 더 성숙하고 발전한 문명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네안데르탈인의 삶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는 사라진 존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바라보려는 소설적 시도다.
이러한 시선은 작품 전반으로 이어진다. 외제니는 수메르 문명에서 기록의 힘을 확인하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지식을 보존할 '지식의 사원'을 세우려 한다. 또 피타고라스의 삶을 거치며 수학과 천문학, 음악과 영성의 관계를 탐구한다.
외제니가 전생을 거듭할 때마다 되풀이하는 과업은 지식과 기억을 기록하고 이를 보관할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다.
베르베르에게 책은 단순히 정보를 담는 물건이 아니다. 사라진 문명을 기억하게 하고, 승자의 역사 뒤에 가려진 또 다른 진실을 남기는 장치다.
그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카르타고 전쟁을 예로 들며 "오늘날 전해지는 역사는 대체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관점에서 쓰였다"며 "작품에서는 사라졌지만 더 평화롭고 성숙했을 수 있는 사람들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영혼의 왈츠'에서 지식과 기억을 위협하는 힘은 '몽매주의'라는 이름으로 반복해 등장한다. 작품 속 몽매주의 세력은 거짓과 공포, 선동을 이용해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며 문명을 과거로 되돌리려 한다. 반대편에는 지식과 진실을 지키고 인간을 해방하려는 힘이 놓인다.
베르베르는 이 같은 구도가 과거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적 극단주의와 종교적 광신, 독재와 여성 억압 등을 오늘날 나타나는 몽매주의의 모습으로 거론했다.
"독재는 세력을 넓히는 반면 민주주의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독재와 전체주의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맞서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가 작품에서 말하는 '빛과 어둠'의 대립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지식을 넓히려는 힘과, 공포와 복종을 통해 인간을 예속하려는 힘의 충돌을 가리킨다. 이러한 대립이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며 역사 속에서 되풀이돼 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베르베르가 12만 년의 과거로 거슬러 간 이유도 과거 자체에 머물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는 "'영혼의 왈츠'가 과거를 다룬 작품처럼 보일 수 있지만, 미래를 더 잘 그리고 예측하기 위해 과거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AI)을 바라보는 시각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베르베르는 인공지능을 '불'의 발견에 비유하며 "불 자체에 선악이 없듯 기술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기술은 인간의 삶을 돕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권력과 전쟁의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모든 과학적 진보와 발견은 악용될 수도 있고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사용하려는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소설 첫머리에 제시되는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 자유의지 50퍼센트'라는 설정은 이러한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유전과 과거의 영향을 받지만,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문명의 퇴행과 진보 역시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시각이다.
베르베르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미래의 화두로 '의식의 변화'를 꼽았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과잉 소비와 기후위기,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책임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의식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며 "기술에서 영성으로 나아가야 하고, 영성의 성숙이 다시 기술의 사용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의 또 다른 축은 여러 생을 건너 이어지는 '영혼의 형제'와의 만남이다. 외제니는 전생마다 깊이 연결된 존재를 만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 엇갈린다.
베르베르는 영혼의 형제가 반드시 연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부모나 자녀, 친구처럼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깊은 연결을 느끼는 존재도 영혼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왈츠'는 이처럼 문명의 기원과 종말을 추적하는 역사 판타지이면서, 여러 생을 거듭하며 자신의 사명과 인연을 찾아가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은 베르베르가 오랫동안 이어온 퇴행 명상 경험에서도 출발했다. 그는 전생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명상을 통해 체험했다고 느낀 여러 삶이 소설의 풍부한 재료가 됐다고 밝혔다.
'개미'를 시작으로 '타나토노트', '신', '파피용', '꿀벌의 예언' 등을 펴낸 베르베르는 과학과 역사, 신화와 영성을 결합해 인간과 문명의 미래를 탐구해 왔다. '영혼의 왈츠'에서도 역사와 고고학적 소재 위에 전생과 환생이라는 상상력을 겹쳐 놓는다.
작품이 끝내 묻는 것은 인간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아니면 과거를 기억하고 다른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지다. 베르베르는 그 가능성을 책과 기록, 그리고 자유의지에서 찾는다.
■ 영혼의 왈츠 1·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