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호남을 중심 삼은 반도체 클러스터 추가 조성 방침을 사실상 밝히고, 이재명 대통령이 삼성·SK 총수들까지 직접 만나면서 이들 기업의 대규모 투자 발표가 임박한 기류다. 후보지로 거론되는 지역 정치권에서는 "선물이 쏟아졌다"는 말도 벌써부터 나온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AI) 기술의 기반인 반도체 산업은 고도의 정책을 동반한 국가 차원의 경쟁 산업으로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수백조 원대 규모로 예상되는 반도체 핵심 기업들의 시설 투자는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 결정인 만큼, 이를 주도하는 정부 차원의 세밀한 지원이 필수라는 조언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李대통령, 최태원·이재용 연쇄 회동…'호남 종합 반도체 공장' 투자 임박 기류
이재명 대통령은 25일 오후 청와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약 1시간 동안 비공개로 만났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시설 투자 계획을 청취하고, 지원책 등을 최종 점검하기 위한 성격의 회동으로 풀이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 19일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투톱 기업들의 총수들과 연쇄 회동을 가진 것이다.대통령과 회장 만남까지 진행된 만큼, 반도체 공장(팹) 신설을 골자 삼은 대규모 지방 투자 계획은 곧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같은 날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지방 곳곳에 새로운 산업 경제 기반을 구축해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윈윈'하는 모두의 성장 시대를 반드시 열어가야 한다"며 "구체적 청사진을 곧 국민 여러분께 보고드릴 예정"이라고 했다. 오는 29일쯤 이 대통령 주재 민·관 합동회의에서 관련 발표가 이뤄질 전망이다.
정치권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오는 7월 1일 출범 예정인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 반도체 전·후공정 팹을 신설하는 방안을 최종 검토 중이다. 충청권을 아우르는 관련 시설 확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당초 전공정 팹에서 생산된 칩을 제품 형태로 완성하는 후공정 팹을 기업들이 중점적으로 고려했으나, 정부와 논의 끝에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에 새기는 전공정 팹까지 모두 짓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전날 관훈토론회에서 전·후공정 팹을 포함하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묻는 질문에 "두 기업과 정부간 논의의 마무리 단계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강기정 광주광역시장도 퇴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이번 투자를 "종합 세트"라고 표현했다.
투자 규모 '수백조' 예상…靑 "반도체 수요 대응 능력 제때 갖춰야"
기업들의 투자 검토안은 정부가 작년 말 발표한 내용과도 맞아 떨어진다. 당시 정부는 첨단 주력 산업의 지방 투자를 촉진하겠다며 광주를 비롯한 남부권에 반도체 혁신 벨트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만 10기에 달하는 팹 건설을 추진 중이다.이번에 김용범 실장은 AI 기술 고도화에 따른 메모리 수요 폭증을 이유로 들며 추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필요성을 강조했다. 해당 기업들도 글로벌 수요 대응 차원에서 2040년대로 예정된 용인 팹 10기의 완공 시점을 2030년대로 앞당기고 있는 만큼, 그 이후를 위한 투자도 일찍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다.
김 실장은 "(용인 팹 완공 이후엔) 수도권에 더 이상 (시설 추가를 위한) 땅도 없다. 전력도 용수도 불가능하다"며 "(삼성·SK) 두 회사가 메모리 생산 능력을 제때 갖추고 서포트(지원)를 해줘야 전 세계 AI 혁명이 차질 없이 이뤄진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산업 특성에 맞는 입지를 찾도록 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지역 균형 성장을 위해 당위적으로 추진한다고 해서 기업들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를 쉽게 결정할 리 없다"고 덧붙였다. 핵심 산업 육성보다 지방 투자에 무게추가 기운 것 아니냐는 시각에 선을 그은 것이다.
"경쟁국 반도체 투자 지원 참고해야" 조언…정부, 인프라 지원 '시동'
생산능력을 추가 확대해야 할 정도로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기가 장기간 이어질 것인가라는 물음표도 일각에 있지만, 치열한 글로벌 경쟁 구도를 고려했을 때 투자가 적극적·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메모리 호황기가 2028년까지는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이후 역사이클이 오더라도 투자를 해야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추격자인) 중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매출보다도 많은 돈을 시설투자와 연구개발(R&D)에 장기간 투입해왔다"고 덧붙였다.다만 이처럼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려면 경쟁국보다 더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조언이다. 해당 전문가는 "미국은 이른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BBBA) 등을 통해 반도체 기업의 연구개발과 시설투자를 대폭 지원하고 있다"며 "(미국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나 마이크론의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보다 그런 측면에서 많게는 수 배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현실화할 경우 전력과 용수, 부지, 전문 인력의 안정적 확보 등이 기업들의 주요 난제로 꼽힌다. 정부도 이를 지원하기 위한 사전 작업에 나선 모양새다. 산업통상부가 이날 입법예고한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에는 비수도권에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기 쉽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방안들이 담겼다. 특히 정부가 전력·용수·도로 등 기반시설 설치비의 50% 넘게 지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중요시설은 최대 100%까지 국가가 부담할 수 있다는 조항도 담겼다.
정부가 작년에 발표한 남부권 반도체 혁신 벨트 조성 계획 관련 '광주 지원안'에는 카이스트를 거점으로 광주과학기술원(GIST)와 전남대, 한국에너지공과대를 연계한 '반도체 연합공대'를 구성해 인력 양성에 집중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칩 제조 기업과 패키징 기업 간 합작 패키징 팹 건설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