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월드컵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25일(한국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A조 최종 3차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0-1로 패했다.
FIFA 랭킹 25위인 한국이 35계단 아래인 60위이자 A조에서 전력이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최약체 남아공에 무릎을 꿇으리라 예측한 이는 없었다. 이번 패배는 4강 신화를 쓴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한국이 겪은 그 어떤 패배보다 치욕적이다.
조 1, 2위를 다투는 까다로운 경쟁국도 아닌, 반드시 승점 3을 제물로 삼았어야 할 최약체를 상대로 당한 패배이기에 충격은 더 크다. 이전 대회 사례는 세계의 벽과 전력 차가 컸던 시기라 이해할 수 있는 패배들이었으나, 이번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역대 월드컵 조별리그 패배에는 늘 참작할 만한 이유나 서사가 있었다. 2006 독일 월드컵(1승 1무 1패) 스위스전(0-2 패)은 오프사이드 판정 논란이라는 어수선한 막판 분위기 속에 아쉬움을 삼켰고,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룬 2010 남아공 월드컵(1승 1무 1패) 아르헨티나전(1-4 패)은 전성기 리오넬 메시를 앞세운 남미 강호와의 절망적인 전력 차를 인정한 무대였다.
1무 2패로 처참한 성적을 남긴 2014 브라질 월드컵 역시 조 편성이 가혹했다. 러시아전(1-1 무) 이후 벨기에(0-1 패)는 물론, 당초 1승 제물로 꼽혔으나 대회 최고 복병으로 재평가받은 알제리(2-4 패)에 연이어 무릎을 꿇었다.
대진운이 따르지 않았던 2018 러시아 월드컵도 시작은 스웨덴(0-1 패), 멕시코(1-2 패)에 실력 차를 절감하며 내리 패했으나, 최종전에서 세계 최강 독일을 2-0으로 무너뜨리는 '카잔의 기적'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두 번째 원정 16강 신화를 쓴 2022 카타르 월드컵마저 패배 속에는 투혼이 있었다. 비록 1승 상대로 정조준했던 가나에 조규성(미트윌란)의 헤더 멀티골 분전에도 2-3으로 석패했으나, 강호 우루과이와 대등하게 맞서고(0-0 무) 포르투갈을 2-1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번 대회 흐름도 앞선 패배들처럼 나쁘지 않았다. 1차전 체코전(2-1 승)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고, 2차전 멕시코전(0-1 패)은 골키퍼 김승규(도쿄)와 수비수 이기혁(강원)의 충돌로 인한 실점 불운 속에서도 경기력은 준수했다.
그러나 남아공전은 전술과 투지 모두 낙제점이었다. 비기기만 해도 조 2위로 32강에 직행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서, 하필 조에서 가장 해볼 만한 최약체를 만나 자멸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홍명보 감독은 전반을 무실점으로 버틴 뒤 후반에 승부를 보겠다며 손흥민(LAFC)을 선발에서 제외하는 변칙 카드를 꺼냈으나 이는 최악의 악수가 됐다. 대표팀은 몬테레이의 폭염 속에서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며 전반 45분 동안 단 하나의 유효슈팅도 날리지 못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손흥민, 옌스 카스트로프(묀헨글라트바흐), 김진규(전북)를 동시에 투입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소용없었다. 손흥민이 가세하며 잠시 공격 활로가 열리는 듯했으나 결실은 없었다. 오히려 후반 18분 오른쪽 수비 라인이 허무하게 무너지며 남아공의 마세코에게 치명적인 선제 결승골을 헌납했다.
남아공은 한 골을 앞서가자 곧바로 수비벽을 두껍게 세우며 한국을 압박했다. 이강인(파리 생제르맹)과 체력을 비축한 손흥민을 겨냥한 상대의 촘촘한 질식 수비에 한국 공격진은 완전히 봉쇄당했다. 한국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이렇다 할 결정적인 기회조차 만들지 못한 채 허둥지둥 경기를 마쳤다.
반드시 잡고 갔어야 할 조 최약체에게 덜미를 잡힌 한국은 이 패배로 조 3위까지 추락했다. 이제 한국은 12개 조 3위 팀 중 상위 8개 팀에 주어지는 32강행 막차 티켓을 노려야 한다. 다른 조 경기 결과를 피 말리며 지켜봐야 하는 처참한 신세로 전락했으며, 설령 기적적으로 토너먼트에 턱걸이한다 해도 이 정도 경기력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