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불금' 저녁, 서울 마포구 마포문화재단 아트홀 맥에는 '영희 페스티벌'(이하 '영희페')의 시작을 기다리는 많은 이들이 관객석을 채웠다. 여성 창작자를 중심으로 하는 종합 문화 축제 '영희페'를 기획한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은 말했다. "이 페스티벌을 성립시켜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뭘 살리고 계시는지 여러분은 오히려 모르실 겁니다. 나중에 아시게 될 거예요. 진심으로 제가 대표해서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가게가 '핫'하고 '유행'이라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들이 뭐라건 '그냥 나는 이게 맛있는데?' 하며 꿋꿋이 어떤 가게에 간다. 오지은은 바로 그런 관객이 좋아할 만한 페스티벌을 만들려고 했다. '영희페'가 "좋아하는 한 명을 보기 위해 다섯 명을 참아야" 하지 않아도 되는, 나아가 '내가 싫어하는 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이 있을 수 있구나!' 하고 관객이 경험하는 자리가 되길 바랐다.
사흘 간의 '영희페'를 마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던 지난 19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난 오지은은,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개회사 때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영희페'의 관객은 미식가이자, 뚝심이 있고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1회에 온 사람들은 전부 그런 분들이고요. 당신들의 뚝심에 감사해요. 첫날 개회사 때도 그랬지만, 지금 관객들은 (자신들이) 여성 창작자들에게 뭘 줬는지 모를 거예요. 하지만 관객들은 했어요."
기꺼이 '영희페'에 함께한 출연진이 모인 뒤풀이 때도, 오지은은 'AI로 만든 합성 사진'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여성 뮤지션 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가 다 같이 식당 안에 있는 모습으로 사진 하나 만들어 줘'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한 결과물 같았다. "서로가 너무 서로의 팬"인데 "처음 만나는" 장면이 반복됐다. 무대에 오른 사람에게도 "이 관계를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토요일(6월 13일) 플레이 맥에서 '영희라는 이름과 호명의 역설'이라는 주제로 무대에 오른 김지승 작가는 열다섯 명쯤 있는 관객석을 상상했다고, 오지은은 전했다. 김지승 작가는 문화 이론과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에 관한 연구와 예술 수업을 진행하며 집필 활동 중이다.
"그 김지승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김지승은 그런 일을 많이 겪을 거예요. 본인에게 적대적인 강연장이 숱했을 거고요. 여기서 놀라운 건… '여러분,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퀴어 이론과 젠더 연구의 대표적 석학으로 꼽히는 인물) 아시죠?' 하는데도 ('영희페') 관객들은 몸을 앞으로 15도 기울이고 있었다는 거예요. 너무 빛나는 표정으로요. 어떤 강연을 들을 때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하며 팔짱을 끼는 사람들은 그 순도를 느껴야 한단 말이죠. 지승이 그걸 느낀 게 너무 기뻤어요. 제도권 밖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오래 강연했지만 그 온도에 완전히 적응한 친구가 이런 환대를 경험한 게요. 지금도 잘하는데, 자기가 환대받을 걸 알고 있으면 얼마나 잘할까!"
'영희페' 출연진을 소개하는 공식 책자에서 음악 쪽은 음악평론가 김윤하가, 문화 쪽은 오지은이 각각 썼다. 싱어송라이터이자인 오지은은, 단독 저서를 여러 권 낸 작가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GV를 매년 진행하기도 하고 팟캐스트를 듣고 또 나가고, 도서전에도 곧잘 가는 사람이다. 당연히 '영희페'에 '문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저는 뮤지션이고 기획자이지만, 한편으로 저 같은 향유자가 엄청 많을 거예요. 김지승 책을 읽고, 원소윤의 코미디를 유튜브에서 보고, 지하철에서는 '영혼의 노숙자'나 '비혼세' 팟캐스트를 듣고, 한때 오지은 음악을 듣기도 하고, 김윤아 선배에게 타오르는 애정을 한 번쯤 가졌고, 근데 첫사랑은 이상은 선배고… 그런 여자를 상정하고 있지 않은 기획자들은 굉장히 안일한 거죠. 문구 굿즈(기획 상품)를 사고, 국제도서전에 가고, 국현미(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보러 가는 사람은 대개 이어져 있어요."
뒤풀이 때 '와아!' 하는 큰 환호성이 나온 순간이 있다. 오지은은 "제가 그랬다. '올해 나왔던 분들은 전부 나오십니다'라고. 내년엔 더 크게 열어야지. 1회에 나와준 사람들인데? 황무지에 와준 사람인데? 그러니까 '어머, 나 진짜 내년에 못 나오는 줄 알았어' 이런 반응이더라"라며 "여기 나온 대단한 영희들도 '올해 출연했으니까 당연히 내년에는 못 나오겠지?' 하고 생각한 거다"라고 말했다.
올해 나온 여성 뮤지션을 다음 해에 못 보는 일은 그간 수많은 페스티벌에서 흔했다. '왜일까?' 하는 문제의식은 있어도 외따로 흩어져 있었다. 오히려 '불림을 못 받는 건 모객력이 없어서인 거겠지?' '내가 괜히 추한 짓을 하는 건가?' 하는 자기검열이 익숙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예전엔 혼자 했다면, 이번엔 많은 사람들이랑 해서 기뻐요."
'영희페'의 '2회'는 이미 1회를 준비할 때부터 구상했다. 올해 가장 아쉬운 건 순문학인 '소설' 섹션이 들어오지 못한 거였다. 섭외를 멈춰야 할 정도로 많은 출연진이 이미 꾸려진 탓이다. 다음에는 이희주, 편혜영, 은희경 등의 작가와 함께하면서, "서울국제도서전보다 더 재미있는" 축제를 기획 중이다. 뮤지션으로는 이소라, 조원선, 한영애 등을 초대하고 싶다고. 시기는 7월 말~8월 초가 알맞다고 생각했다.
본인 표현을 빌리면, '영희페'는 "시작 자체가 망상"이었다. 선우정아, 이상은, 김윤아가 헤드라이너이고 원소윤 크루와 영혼의 노숙자가 나오는 이런 페스티벌이라니, "다들 망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운을 뗀 오지은은 "내년엔 LG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에서 오케이(OK)를 해 줬으면 좋겠다. 그 정도의 좌석을 갖춘 곳이었으면 좋겠다. 스탠딩은 (공연 관람에) 제약이 있어서, '영희페'는 좌석제가 맞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비록 올해는 무대 미술에 돈을 쓰지 못해 '깡무대'로 치렀지만, 내년엔 이 점도 보완하고 싶다. 다행히 출연진 중 "두려워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너무 좋은데?'라고 했다. 오지은은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2회 '영희페' 때는 명필이 붓까지 좋으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 '영희페' 끝나고 나서 '이거 봐봐, 사람 많이 온다고 했잖아.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그렇네!' 하고 해 주는 게 너무 기쁘다"라고 밝혔다.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개런티로" 와 줬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개런티를 지급하는 것도 내년의 숙제다. 오지은은 "이걸 알아본 관객들에게 '돈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어요!' 하고 보여주고 싶다. 여자들끼리 하는 축제가 손해 보지 않고 잘 끝났다는 걸 증명했으니까. 내년에는 그들이 받던 개런티를 받게 하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영희페'는 전야제 4만 4천 원, 1일권 7만 7천 원, 2일권 11만 원, 전일권 13만 원 등 매우 저렴한 푯값으로도 화제였다.
굿즈(기획 상품, MD라고도 한다)도 넉넉히 뽑을 예정이다. "정말로 정말로 아주 바쁜, 가장 잘나간 지 아주 오래된 여성 디자이너"인 슈퍼샐러드스터프(SUPERSALADSTUFF)가 담당한 모자, 에코백, 슬로건, 금속 배지, 스포츠 양말, 티셔츠, 손수건, 수건은 오래지 않아 품절되곤 했다. 현장에서 굿즈를 사지 못해 아쉬웠다는 후기가 쏟아졌다.
오지은은 "굿즈를 조금 찍은 것 가지고도 엄청 다퉜는데 (나중엔) 싸움을 포기했다. 그 모든 건 선례가 없었기 때문일 거다. 티켓도 이렇게 팔릴 줄, 오히려 우리 실무자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라고 말했다. 원성에 힘입어(?) 굿즈 일부는 온라인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수건과 티셔츠 2종은 오늘(26일)까지 주문할 수 있고, 해당 주소는 '영희페' 공식 인스타그램을 참조하면 된다.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포스터도 슈퍼샐러드스터프의 작품이다. 흔히 '푸른 별 지구'라고 하면 땅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바다라는 데 착안했다. 출연진 이름은 전부 같은 크기로 쓰였다. "평소에는 섬 같이 떨어져 있는" 여성들을 표현했다. '여자 사랑 판이 벌어졌는데 내가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다며 "그래서 여자 음악가, 여자 예술가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혼자 두면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라고 한 뮤지션 김사월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여성 창작자를 혼자 두지 않고 이은 '영희페'를 통해 오지은이 바랐던 건 이거다. "언제나 조금은 아귀가 안 들어맞는 기분으로 살다가 인생의 디폴트(기본값)는 나구나 하는 걸 제가 느꼈듯, 사람들이 그걸 경험했으면 좋겠어요. 이 대단하고, 사랑받는 게 당연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오지은의 '다음 앨범'에 관해 물었다. 데뷔 20주년이 되는 2027년에 네 번째 정규앨범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오지은은 "전주살이에 관한 책 원고를 다 썼고 고치는 일만 남았다. 아무래도 책 쓰는 기간과 음악하는 기간을 같이 가져가긴 어렵더라. 다음 앨범은 아주 천천히 준비할 것 같다. 꼭 20주년에 맞춰 내려는 건 아니어도, (그때) 신보의 음악을 하고 싶긴 하다"라고 답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