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 속에 찢긴 '김일성 사진'…격렬했던 34년전 남북 핵협상

통일부 1990년대 초 남북회담문서 공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출범 뒤 결렬 과정
"남북회담 사례 중에 가장 터프한 협상"

통일부는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총 32회에 걸쳐 진행된 핵협상을 기록한 3836쪽 분량의 남북회담 문서를 30일 새로 공개했다. 연합뉴스

남북은 지난 1991년 12월 31일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토대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구성해 1년 가까이 남북 상호사찰 등을 놓고 핵 협상을 벌였다.
 
1992년 3월 1일 1차 회의를 시작으로 그 해 12월 17일 13차 회의까지 이어졌는데, 회의 기간 내내 남북은 그야말로 '격돌'했다. 
 
통일부가 30일 공개한 남북회담 문서에는 당시 남북의 대표들이 핵협상 과정에서 벌였던 치열한 신경전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회담장에서는 서로 기선을 잡기 위해 '놈'이나 '깡패', '도둑' 등과 같은 비속어가 오가는가 하면 특정 신체 분위를 거론하는 인신공격도 이뤄졌다.
 
최우진 북측 대표는 1992년 6월 30일 열린 6차 회의에서 공로명 당시 남측 대표의 탈모를 겨냥해 "공 위원장 머리카락 없는데, 괜히 모자 안 쓰고 나갔다가 햇볕에 쬐게 되면 건강에 나쁘다"며 건강을 위해주는 척 조롱했다. 
 
남측의 반격이 없을 수 없었다. 북측 대표가 남측 대표로부터 김일성 사진이 게재된 신문을 건네받고, 흥분한 나머지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찢는 장면도 연출됐다. 
 
회담 때 마다 6·25전쟁의 책임을 남측에 돌리고 미국의 핵위협을 이유로 핵 문제를 정당화하는 북한의 논리가 계속되자 공로명 남측 대표는 그 해 12월 13차 회의에서 "외세, 외세하기 때문에 누가 외세에 의존적이냐 사대적이냐 하는 사진을 하나 가지고 왔다"며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는 회담 이틀 전 조간신문 사진을 최우진 북측 대표에 건넸다.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임을 증명하는 구소련 외교문서가 당시에 공개됐기 때문에 관련 신문 사진을 증거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자 최 대표는 이를 의식하지 못한 듯 "내 쨉니다. 사진"하며 찢었고, 이를 본 공 대표가 "위대한 지도자 사진인데 왜 찢느냐"고 하자, 북측 대표들이 그제 서야 상황을 깨달은 듯 일제히 "(남측이) 오늘 완전히 도발"하고 있다고 항의하며 소란한 상황이 벌여졌다. 
 
북측의 김수길 대표는 "그쪽이 도발하려고 계획적으로" 준비했다고 소리쳤고, 공 대표는 "그러니까 요 다음 부터는 그런 얘기 하지 말라 이 얘기야"라고 응수해, 다시 한 번 회담을 진행하기 어려운 소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는 이날 회의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북측이 1년 내내 사찰문제에 대해 지연전술을 폈고, 이에 대해 남측이 '팀 스피릿' 훈련 재개라는 압박카드로 대응했으나,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하고 회의가 결렬된 것이다.
 
이후 30여년이 지난 뒤 북한은 핵 무력정책법과 헌법 개정 등을 통해 핵 무력을 법제화했다. 
 
북한의 핵 무력이 이처럼 고착화되고 있는 만큼 북한의 핵 개발 초기에 열린 당시 남북협상에 대해서는 여러 아쉬움도 제기된다. 
 
북한이 애초부터 협상을 통해 핵을 포기할 의사가 과연 있었는가 하는 문제제기와 함께 이와는 별도로 남측이 유연한 대응으로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남북회담 문서공개 심의위원인 정승훈 전 남북회담본부장은 "남북회담 사례 중에 가장 터프한 협상으로 회담 석상에서 욕을 하거나 모욕하는 언사가 있었고, 또 굉장히 거친 언사를 사용했다"며 "남북관계의 분기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회담이었는데 의미 있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 전 본부장은 "남측은 북측의 군사기지도 포함해 불시 사찰에 응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북측이 수용하기 쉽지 않은 강압적 사찰 조건"이라며, "유인책 없이 압박성 레버리지만 사용한 것은 우리 협상력 측면에서 아쉬운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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