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와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 피지컬 AI를 중심으로 한 3대 메가 프로젝트를 발표했지만, 전문가들은 성공 여부가 투자 규모보다 이를 뒷받침할 제도와 인프라 구축, 인재 확보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았다.
수천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 자체보다 전력과 용수, 송배전망 같은 기반시설을 제때 구축하고, 정권 교체와 시장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AI 시장이 현재와 같은 성장세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제만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보다, 기술 변화와 수요 둔화까지 고려한 '플랜B'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공장 빨리 지어도 전력망은 늦는다"
1일 정부에 따르면, 3대 메가 프로젝트는 반도체 메가팹과 AIDC, 피지컬 AI를 국가 신성장축으로 육성하기 위해 민간과 정부가 총 4755조원을 투자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정부는 수도권에 집중된 첨단산업을 서남권과 충청권, 영남권 등 전국으로 확산해 AI 산업 경쟁력과 지역 균형발전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투자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실행력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먼저 제기된 과제는 인프라 구축 속도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메가팹과 AIDC는 수년 안에 완공될 수 있지만 송전망과 변전소, 산업용수 공급시설은 기반시설을 갖추기까지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반도체 공장이나 AIDC보다 전력 인프라 건설 속도가 훨씬 느린 것이 현실"이라며 "공장이 완공된 뒤에야 전력망이 따라오는 상황이 되면 정부가 강조하는 속도전은 의미가 없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와 AIDC의 경우 전력과 용수의 총량보다 공급 시점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장은 수년 내 완공되지만 송전망과 변전소 구축에는 입지 갈등과 보상 협상 등 문제로 통상 6~10년, 최악의 경우 20년까지 걸릴 수 있어 공장 가동 시기와 인프라 완공 시기 사이에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기영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확보를 핵심 과제로 꼽았다.
최 전 장관은 "ESS(에너지저장장치) 등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시스템을 차질 없이 구축해야 한다"며 "용수 공급 또한 꼼꼼한 계획과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력망과 수자원 관리에 인공지능과 디지털 트윈 등의 기술을 적극 도입해서 한 차원 높은 인프라를 구축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정권 바뀌어도 멈추면 안 돼"
전문가들은 수천조 원 규모의 반도체·AI 인프라 구축이 10년 이상 이어질 장기 프로젝트인 만큼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교수는 "기업들이 원하는 것은 과거 개발 시대처럼 정부가 산업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한국에서 영속적으로 사업을 키울 수 있는 제도와 인프라를 함께 정비해주는 정책적 연속성, 제도에 대한 신뢰, 그리고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는 투자 의지"라고 말했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도 국가의 의지와 책임 있는 로드맵을 강조했다.
장 교수는 "국가가 말로만 (지역) 분산을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송전망과 용수 인프라, 인력양성, 배후도시를 책임지고 만들어내겠다는 구체적인 재정과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며 "그 의지와 계획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인프라 부족 등을 이유로 한 비판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 연속성에 대한 우려를 의식한 듯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달 29일 국민보고회에서 "특별히 하나 약속을 드린다면, 청와대 안에 이 사업에 대한 직할 담당관을 두고 3대 메가프로젝트를 제가 직접 챙기고 신속하게 집행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AI 호황만 믿어선 안 돼"…플랜B는?
권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 호황과 글로벌 빅테크의 AI 투자 확대가 현재 계획의 중요한 전제가 되고 있지만, 기술 변화나 지정학적 변수로 시장 환경이 급변할 가능성에도 충분히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AI 투자 속도가 둔화되거나 새로운 컴퓨팅 기술이 등장하고 공급망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 "정부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고려한 컨틴전시(Contingency) 플랜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술 발전에 따라 전력 효율이나 냉각 방식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는 만큼, 인프라 역시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적응형 계획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최 전 장관은 "주거, 학교, 병원, 문화시설 등 수도권 못지않은 정주 여건 조성으로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정부가 충분히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한우 영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산업단지 못지 않게 지역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수도권의 자본과 대기업이 지역으로 내려와 자원을 흡수한 뒤 다시 수도권으로 이익을 가져가는 '약탈적 클러스터'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지역에서 창출된 데이터, 기술, 인재, 기업가 정신이 지역 안에서 다시 투자와 창업으로 이어지는 순환형 혁신경제, 즉 내생형(Endogenous) 혁신생태계를 구축해야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정주 여건 조성은 물론 전력과 용수 확보 방안을 마련해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으로 용수의 경우 장흥댐·동복댐·섬진강댐 등의 여유 물량과 기존 댐 증고, 하수 재이용 등을 연계한 다중 수원 체계를 구축해 하루 100만톤 이상 공급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송전망은 기존 선로의 송전용량을 높이고 일부 구간은 지중화(地中化)하는 방식으로 주민 수용성과 공급 안정성을 함께 확보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