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사이 손해배상 소송에서 부모의 권리뿐 아니라 '아이의 권리'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부모가 소송의 당사자이지만, 아이에게 무엇이 가장 이로운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취지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17-1부(위광하·조광국·안승훈 고법판사)는 지난달 11일 아버지 A씨가 전 배우자 B씨와 장인 C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을 선고했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 이유를 일부 보완하면서 '아동의 복리 및 최선의 이익(the best interests of the child)'을 판단 기준으로 제시했다.
해당 사건은 B씨가 A씨와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미성년 자녀를 데리고 같은 단지 내 친정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작됐다. A씨는 자신의 거소지정권과 보호·교양권이 침해됐다며 위자료 1200만 원을 청구했고, 항소심에서는 면접교섭 방해도 손해배상 사유라고 주장했다.
1심은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고, 항소심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쟁점은 B씨가 아이를 데리고 거처를 옮긴 행위 자체를 공동친권자인 A씨의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로 볼 수 있는지 여부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A씨의 공동친권 행사가 일부 제한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정만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부모의 권리만이 아니었다. 아이 역시 자신의 복리에 맞는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특히 부모 관계가 사실상 파탄 난 상황에서는 아이가 부모 모두와 함께 생활하기 어려운 만큼, 단순히 아이를 데리고 거처를 옮겼다는 사정만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봤다. 어느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것이 아이의 복리에 더 부합하는지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이 적시한 '아동의 안전을 위해'를 '아동의 복리 및 최선의 이익을 위해'로 수정하기도 했다. 부모 사이 권리 충돌을 판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이의 복리와 최선의 이익 역시 중요한 판단 요소라는 점을 보다 명확히 드러낸 셈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실제 양육환경도 함께 살폈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생활할 당시부터 평일에는 외조부모의 돌봄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친정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생활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A씨와의 면접교섭도 계속 이뤄질 수 있는 사정 등을 종합하면, B씨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온 행위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정도의 권리 침해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항소심 판결문에 새롭게 담긴 '아동의 복리 및 최선의 이익'이라는 표현은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취지와도 맞닿아 있다. 협약 제3조는 법원을 비롯한 모든 기관이 아동과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가장 먼저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제6조는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번 판단은 2013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도 맥을 같이한다. 당시 대법원은 베트남 국적 어머니가 한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베트남으로 데려간 행위가 미성년자약취죄에 해당하는지를 심리했다. 원심은 아버지의 공동양육권이 일부 제한된 측면은 있지만 자녀의 이익이 침해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도 이를 확정했다.
대법원은 부모 일방이 자녀를 데리고 거처를 옮겼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범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부모의 보호·양육권뿐 아니라 자녀의 보호·양육 상태와 복리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한편 A씨는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부모의 권리뿐 아니라 아동의 최선의 이익까지 함께 고려한 이번 항소심 판단이 대법원에서도 유지될지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