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머리 다시 바다로…해양수도 부산, 산업·금융 돛 펼치고 항해의 시간

인천에 GRDP 역전, 수출 비중 2%대…'제2도시'의 그늘
물동량 세계 7위·연결성 4위… 늙어가는 도시, 살아있는 항구
해수부·HMM 이어 해사법원까지… 세워지는 해양수도의 뼈대
"기업 유치는 플랫폼"…조선기자재·AX와 맞물려야 해양산업 활성화
중앙의 협조와 부울경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요조건

부산 영도구 봉래산에서 바라본 야경. 부산시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민생회복에서 해양수도 완성까지…'전재수호' 핵심 공약 과제는?
②뱃머리 다시 바다로…해양수도 부산, 산업·금융 돛 펼치고 항해의 시간
(계속)

"뱃머리를 돌려 다시 바다에서 길을 찾는다"

민선 9기 부산시정이 내세운 도시의 비전은 '미래 대전환의 중심 해양수도 부산'이다. 대한민국 제2도시가 아닌 해양수도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지속해서 약해지는 지역 경제와 오늘도 수도권으로 떠나는 청년들의 발걸음 속에서, 민선9기 부산시정이 내놓은 청사진은 무거운 과제와 청신호를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수출 한국의 심장에서 'n분의 1' 경쟁의 도시로

신발과 합판을 실은 배가 쉴 새 없이 부두를 드나들던 시절, 부산은 수출 대한민국의 심장이었다. 전국의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고, 공장 굴뚝과 크레인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그렸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풍경은 통계 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최근 정리한 지역 경제 지표를 보면 부산의 지역내총생산(GRDP)는 지난 2023년 인천에 역전당했다.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7%에 불과하다.

수출은 더 가파르게 미끄러졌다. 지난 2016년 전국의 2.8%였던 부산 수출 비중은 지난해 2.0%까지 내려앉았다. 사람도 떠났다. 2016년 350만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지난해 말 324만명으로 줄었고, 고령인구 비율은 25.3%로 서울과 인천을 크게 앞지른다. 지난 2021년 이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청년이 떠나니 기업이 오지 않고, 기업이 없으니 청년이 다시 떠나는 악순환이다. 대한민국 경제의 맨 앞열에 서있던 부산은 굴곡의 시간이 지난 지금 중앙정부가 내놓는 정책의 낙수를 받아내기 위해 다른 지역과 'n분의 1' 경쟁을 벌이는 처지가 됐다.

바다로 눈을 돌리면 경쟁력이 살아난다… 여전히 세계 4위의 연결망

낙심과 실망을 안겨주던 수도권을 향한 시선을 반대편 바다로 돌리면 또 다른 기대와 희망이 잠재해 있다.

부산의 미래는 동남지방데이터청이 지난달 '데이터로 본 부산과 세계 주요 항구 도시' 분석 결과에서 찾을 수 있다. 데이터는 상하이와 싱가포르, 로테르담 등 세계 10개 항만 도시의 10년치 지표를 비교했다.

데이터로 본 부산과 세계 주요 항구 도시. 동남지방데이터청 제공

부산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지난 2016년 1945만TEU에서 지난해 2488만TEU로 21.8% 늘었다. 세계 100대 항만 중 7위, 환적 물동량만 놓고 보면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2위다.

항만이 세계 해운망에 얼마나 촘촘히 연결돼 있는지 보여주는 항만연결성지수는 1651.6점으로 세계 4위에 올랐다. 10년 전보다 12.4% 오른 수치로, 상승 폭은 상하이에 이어 두 번째다. 인구가 7.1% 줄어드는 동안에도 항구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는 얘기다.

물론, 경고음도 함께 울린다. 선석 생산성은 같은 기간 14.8% 떨어져 세계 14위에서 26위로 밀렸고, 배가 항구에 머무는 평균 재항시간은 21.7시간에서 31.9시간으로 10개 도시 중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항만의 덩치는 커졌지만 처리 효율은 뒷걸음질친 셈인데, 뒤집어 말하면 투자와 혁신이 더해질 여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시의 경쟁력이 약해지는 와중에도 항구는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이 부산이 다시 바다로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 이유다.

해수부·HMM·해사법원… 해양수도의 뼈대가 세워진다

민선 9기 부산시정은 그 전환의 출발점에 서 있다. 지난 1일 취임한 전재수 부산시장은 '미래 대전환의 중심 해양수도 부산'을 도시 비전으로 내걸었다. 시장직 인수위원회가 확정한 4대 도시 목표의 첫머리도 '세계를 연결하는 해양수도'다.

구호로만 보기 어려운 근거들이 이미 쌓이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859명의 직원이 내려왔고, 북극항로 진출을 총괄할 북극항로추진본부도 부산에서 출범했다.

국내 최대 국적선사 HMM은 지난 4월 노사 합의를 거쳐 본사 부산 이전 등기를 마쳤다. 임시 사옥을 거쳐 북항 재개발지에 랜드마크급 신사옥을 짓는다는 구상이다. 올가을부터 서울 인력의 부산 근무 전환이 시작된다.

상공계는 HMM 이전만으로 5년간 15조원 이상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2만명 이상의 고용 창출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은 이미 부산으로 본사를 옮겼다. 여기에 해사 분쟁을 전담할 해사국제상사법원이 오는 2028년 3월 부산에서 문을 연다.

전재수 시장 개인의 이력도 눈여겨봐야할 대목이다. 새 정권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해수부와 HMM 이전을 직접 지휘한 그는 해양에 대한 이해도와 중앙정치권과의 연결망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산 동구 해양수산부 본관. 송호재 기자

부산이 이미 품고 있는 해양 관련 연구 역량도 든든한 자산이다. 영도 동삼혁신지구 해양클러스터에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국립해양조사원 등 해양 관련 기관 10여 곳이 모여 있고, 이달에는 해양수산 인공지능·데이터 기반의 산학연 협력센터가 문을 연다.

북항 재개발지에도 부산항만공사와 한국해양진흥공사 등이 참여하는 해양기관 클러스터가 조성된다. 정부 국정과제인 북극항로 개척까지 더해지면 부산은 행정과 기업, 사법, 연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국내 유일의 해양 거점이 된다.

다만, 공약을 토대로 그려진 해양수도 부산의 밑그림이 계획대로 현실화하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지역에서 속도전을 주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경실련 도한영 사무처장은 "해수부와 HMM 이전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고,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이전처럼 하기로 한 것부터 빨리 가시화해야 한다"며 "그래야 산업 생태계가 형성되고 자연스럽게 일자리 문제 해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해양기업 몇 개 온다고 되는 일 아니다… 기존 산업과의 시너지가 승부처

전문가들과 상공계가 입을 모으는 대목은 하나다. 해양수도는 해양기업 몇 개를 유치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의 기존 산업이 함께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해양수도의 입지도 단단해질 수 있다는 논리다.

상공계는 우선 민선 9기 공약의 방향에 후한 점수를 줬다. 부산상공회의소 심재운 경제정책본부장은 "가덕신공항 적기 개항과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이전, 해양 AI데이터센터, 전력반도체 핵심 허브 육성, 취수원 다변화 등은 지역 경제계가 지속해서 건의해 온 핵심 과제와 같은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그는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와 기회발전특구 세제 지원 확대, 기업 이전을 촉진할 조세제도 개선처럼 실행력을 높일 구체적인 제도는 중앙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부산신항. BPA 제공

부산에는 이미 조선기자재와 항만물류, 해양금융, 관광 등 해양산업과 맞물릴 수 있는 산업 기반이 형성돼 있다.

심 본부장은 "해운기업 유치는 기업 하나를 데려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는 플랫폼으로 활용해야 한다"며 "지역 중소·중견기업이 공급망에 참여하고 연구개발과 디지털 전환, 해양데이터 산업까지 연결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북극항로가 열리면 물류를 넘어 쇄빙선 건조 같은 고부가가치 선박 제조와 친환경 연료, 항만서비스, 해양보험까지 파급효과가 번질 수 있다는 게 상공계의 계산이다.

기존 기업들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도록 돕는 일도 시급하다. 제조업 비중이 높은 부산의 특성상 중소기업의 AI 전환, 이른바 AX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심 본부장은 "중소기업들이 AX를 쉽게 도입할 수 있도록 실증 사업과 전문인력 양성, 데이터 활용 지원 같은 현장 중심의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며 "기업이 체감하는 규제 개선과 지원 정책을 경제계와의 긴밀한 소통으로 신속하게 시정에 반영하는 현장 중심의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 시장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서부산 제조 AX 산업벨트 구축과 해양 AI 대전환 클러스터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해양수도의 성패는 새 기업과 옛 산업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의 정밀도에 달렸다.

정점은 금융… 동남권투자공사가 마중물 될까

산업의 배후에는 돈이 흘러야 한다. 해양수도의 마지막 퍼즐로 금융이 꼽히는 이유다.

마침 물꼬가 트였다. 정부는 지난 3일 진주 경상국립대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영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동남권투자공사 설립을 공식화했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의 대안으로 추진돼 온 이 정책금융기관은 이제 실현만 남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해양산업과 글로벌 무역항,  무엇보다 북극항로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가 금융에 있는 만큼 정부의 의지는
환영할만 한 일이다.

부산연구원 허윤수 선임연구위원은 "해양수도 기능의 정점은 결국 금융"이라며 ",지금부터 금융과 산업의 생태계를 만들어 놔야 시장이 왔을 때 금방 불이 붙는다"고 말했다.

상공계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심 본부장은 "지역 기업들이 성장 단계에 맞는 금융을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도록 금융기관과 동남권투자공사 같은 정책금융을 연계하고, 투자와 연구개발을 촉진할 다양한 인센티브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BNK금융그룹 같은 지역 금융기관과 지역 산업의 연계도 새 국면을 맞을 수 있다. 정책금융이 마중물을 붓고 지역 금융이 실핏줄 역할을 맡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문현금융단지에 머물러 있던 '금융중심지 부산'의 간판도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된다.

차근차근, 그러나 과감하게… 중앙과의 협력·부울경 시너지가 열쇠

해양수도는 부산 홀로 완성할 수 없다. 해수부 산하 공공기관 이전과 동남권투자공사 설립, 북극항로 개척 모두 중앙정부의 결단과 예산이 뒤따라야 하는 과제다.

전재수 부산시장이 1일 취임 이후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송호재 기자

부산울산경남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메가시티 복원 역시 광역 교통망과 공동 산업 전략의 예산 근거를 만들기 위해 미룰 수 없는 숙제로 꼽힌다.

지방분권부산시민연대 박재율 대표는 "3개 시도 단체장들이 정파를 떠나 머리를 맞대고 중앙정부와 긴밀히 협력해, 실질적인 권한과 재정권을 확보하는 분권형 균형발전의 광역적 틀을 만드는 데 지금 바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30년 가까이 구호에 머물렀던 해양수도가 처음으로 행정과 기업, 사법, 금융이라는 네 개의 기둥을 함께 세울 기회를 잡았다. 남은 것은 지역의 의지와 속도다.

전재수 부산시장은 "비수도권의 맏형인 부산이 수도권 일극 체제를 극복하는 첫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은 명확하고, 그것은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20년 부산에서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때마다 실적과 성과로 답해왔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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