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미국 월드컵 대표팀 스트라이커 폴라린 발로건(25·AS모나코)의 징계 유예를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에게 요청했다고 확인하면서 또다른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인판티노 FIFA 회장은 발로건의 '출전정지 유예' 결정에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트럼프, FIFA 회장과의 통화 사실 인정
미국팀 골잡이 폴라린 발로건은 지난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북중미 월드컵 32강전에서 레드카드를 받았고, 6일 벨기에와의 16강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됐다.하지만 FIFA는 발로건에게 내려진 한 경기 출전정지 처분의 집행을 1년 유예한다고 미국축구협회에 통보하면서 형평성 논란이 일었다.
또 FIFA가 발로건의 출전정지 결정을 번복한 배경에 트럼프 대통령과 인판티노 FIFA회장과의 통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은 더 거세졌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스스로 인판티노 FIFA 회장과의 통화 사실을 시인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열린 '트럼프 저축계좌' 출범 행사에서 기자로부터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과 레드카드와 관련해 통화한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렇다. 잔니와 통화했다"고 답했다.
그는 "그건 파울이 아니었다. 중대한 위반 조차 아니었다"며 "전속력으로 달리던 두 선수가 우연히 서로 부딪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달리는 중에 발을 들어 다른 사람의 발에 정확히 올려놓을 수는 없다"며 발로건이 레드카드를 받을 당시 상황이 고의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해당 경기 심판진이나 경기에 극도로 민감한 선수, 코치진이 아닌 제3자의 주장이지만, 그 제3자가 하필이면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해당 주장의 무게감이 가볍지만은 않다.
당연히 정치가 월드컵을 오염시켰다는 비판이 거세지는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레드카드를 꺼내든 심판을 겨냥해 "과거 기록을 확인해보면 좀 의심스럽다"며 "원한다면 (해당 심판의) 과거 기록을 제공할 수 있다. 그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판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또 "팀의 최고 선수, 또는 그에 버금가는 선수를 뺏어가면서 '출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정말 불공평하다"며 "그래서 나는 FIFA에 재검토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는 그(인판티노 회장)에게 뭘 하라고 말한 건 아니다. 그가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 (FIFA 내부의) 위원회가 결정했으며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16강전 상대인 벨기에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만약 그들이 우리를 이긴다면 정말 자랑스러울 것이며, 그렇지 않은(발로건이 출전 정지된) 상황에서 그들이 이긴다면, 나는 2020년 대선처럼 조작됐다고 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역대 월드컵에서 찾아보기 힘든 장면…FIFA 회장은 "난 관여 안 해"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역대 월드컵 무대에서 지금까지 레드카드가 189장 나왔지만 출전정지 처분을 피한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다.앞서 1962년 칠레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브라질 가린샤가 퇴장당했으나 결승전에 출전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다만 당시에는 자동 출전정지 제도가 없어 징계가 번복된 사례는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인판티노 FIFA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의 통화 사실을 공개하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인판티노 회장은 같은 날 폴라린 발로건의 '출전정지 유예' 결정에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적극 해명했다.
그는 'FIFA 미디어'의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글을 올려 "FIFA의 사법 기구는 독립적"이라며 "FIFA 징계위는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FIFA 징계 규정을 적용하고 해당 규정과 제시된 구체적 사실에 근거해 사건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김에 따라 FIFA의 징계 유예 결정이 나오고, 특히 공정해야 할 FIFA가 정치 권력의 압력에 굴복한 것처럼 비쳐지자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한 것으로 풀이된다.
인판티노 회장은 "나는 미국 대통령과 월드컵 관련 사안을 정기적으로 논의하며, 이번 사안에서도 전세계의 국가 지도자, 정부 당국자, 축구 관계자, 기업 경영진으로부터 다양한 사안에 대해 전화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화 중에 나는 FIFA의 독립적 사법 기구가 관여된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며, 이 사건은 결정권이 있는 기구에 의해 적정한 절차를 거쳐 결정될 거라고 설명했다"며 "이게 바로 FIFA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며, 내가 항상 지킬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가 축구를 오염" "부끄러운 줄 알라" 유럽 축구계 '부글부글'
하지만 축구가 일상을 지배하는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월드컵을 오염시켰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당장 미국과 16강전을 앞둔 벨기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부적절한 행동을 규탄했다.
축구 심판 출신인 막심 프레보 벨기에 부총리 겸 외무장관은 이날 정치매체 폴리티코에 "진짜로 전화 한 통이 이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이끌어냈다면 축구와 스포츠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벨기에 사회당도 성명을 내고 "부끄러운 줄 알라. 돈이 좌우하면 월드컵은 모든 신뢰를 잃는다"며 "트럼프를 기쁘게 하려고 규정을 바꾸고 편법을 쓰다니 FIFA와 월드컵, 미국 모두에 참담한 일"이라고 일갈했다.
프랑스어권 중도정당 레장가제 소속 이방 브루그스트레트 유럽의회 의원은 "트럼프가 개입하자마자 퇴장이 갑자기 부당한 판정이 되다니 놀랍다. FIFA는 공정을 지켜야지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며 "경기장에서 보자. 데블스(벨기에 대표팀 별명)의 승리는 더욱 값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축구연맹(UEFA)도 성명을 통해 "레드라인을 넘었다. 퇴장에 따르는 최소 1경기 자동 출전정지는 재량으로 선택할 수 없고 관할 기관의 결정도 필요하지 않다"며 "전례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정당화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맹비난했다.
또 "축구는 어디서나 같은 규칙으로 경기하기 때문에 신뢰받는 것"이라며 "규칙의 확실성이 그걸 지켜야 할 이들에 의해 더 이상 보장되지 않으면 경기의 온전함과 대회 신뢰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
벨기에왕립축구협회(RBFA)는 FIFA가 징계 유예 결정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이의 제기 절차까지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유럽 축구계 인사들도 FIFA의 징계 번복을 비판하고 나섰다.
독일 대표팀 감독으로 내정된 위르겐 클롭은 "진짜 트럼프와 인판티노가 서로 합의해 결정했다면 미친 짓"이라며 "축구를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은 축구와 관련된 어떤 일에도 관여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인판티노와 원한 관계인 제프 블라터 전 FIFA 회장은 엑스(X·옛 트위터)에 "레드카드는 정치적 통화로 취소되는 게 아니다"라며 "FIFA여, 어디로 가는가(Quo Vadis, FIFA)"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