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라고 믿었던 마음은 언제 위선이 될까. 배려는 어디까지 호의이고, 어느 순간부터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될까.
2017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뒤 인간 내면의 모순과 윤리적 딜레마를 꾸준히 파고들어 온 작가가 4년 만에 내놓은 여덟 편을 엮은 소설집 '행복한 소설가'는 작품들은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선의와 악의가 쉽게 나뉘지 않는 순간을 포착한다.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시혜가 되고, 용서를 구하려는 고백이 변명이 되며, 진심이라 여긴 감정이 자기기만으로 드러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2025년 현대문학상 수상 후보작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은 불륜 상대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에게 돈을 돌려줘야 하는 인물의 막막한 상황을 다룬다. 용서를 구해야 하는 대상은 타인만이 아니다. 소설은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인물을 세운다.
한국현대소설학회 '2026 올해의 문제소설'로 선정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손해사정사의 고해성사를 따라간다. 보험사기 사건과 자신의 과거가 겹치면서, 희망과 억울함, 수치와 용서의 감정이 서로 뒤엉킨다.
표제작 '행복한 소설가'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다. 평온한 일상 때문에 쓸 수 없다고 믿던 그는 아내가 일하는 도서관의 경계선지능인 동료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소설의 소재로 삼으려 한다. 작품은 동정과 배려, 불편함과 혐오가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동시에 작동하는지 묻는다.
이 밖에도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나를 아는 사람들', '부딪히는 돌과 바위들에게', '느리게 흩어지기', '분재' 등은 가족, 직장, 글쓰기 모임, 입양과 돌봄의 관계 안에서 어설픈 호의와 단단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행복한 소설가'는 선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르는 쉬운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좋은 마음이라 불러온 것들 안에 섞인 불안, 우월감, 자기연민, 수치심을 끝까지 들여다본다.
임현 지음 | 창비
익숙한 현실과 낯선 세계가 꿈처럼 뒤섞이는 소설, 박보미 작가의 '그루잠'은 많은 이들에게 '덕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저자가 소설가로 선보이는 작품으로, 기억과 진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미스터리 판타지 서사를 담았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윤설이 있다. 따뜻한 마음을 지녔지만, 그의 삶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모진 시간을 홀로 견디는 동안 윤설이 믿어온 세계는 조금씩 흔들리고, 선과 악, 기억과 망각,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흐려진다.
소설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문장처럼 사라진 기억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분명 잊었지만 잊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상한 공백, 그 안에서 윤설은 자신이 믿어온 삶과 세계가 정말 진짜였는지를 묻게 된다.
작품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의 긴장감과, 현실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는 판타지적 분위기를 함께 품고 있다. 꿈처럼 교차하는 시공간의 조각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퍼즐처럼 맞춰진다.
그러나 '그루잠'이 붙드는 질문은 장르적 반전에만 머물지 않는다. 소설은 선의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끝내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선함은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윤설은 쉽게 상처받고도 누군가를 완전히 미워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복수보다 침묵을 택하고, 상흔을 혼자 견디며 하루를 버틴다.
박보미 지음 | 오픈도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