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한글 현판 병기' 첫 공론화 토론…"정체성" vs "원형"

문체부·행안부 '모두의 토론회' 개최, 국민 200명·전문가 참여
사전 의견수렴선 '문화유산 원형 보존' 76%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백양누리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한글 병기해야 할까요? 모두의 토론회'에서 인사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광화문 현판에 한글을 함께 다는 '한글 현판 병기' 방안을 놓고 첫 공론화 토론회를 열었다.
 
국가 정체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찬성론과 문화유산의 원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반대론이 맞선 가운데, 충분한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행정안전부는 2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그랜드볼룸에서 '광화문 한글 현판 병기'를 주제로 첫 번째 '모두의 토론회'를 열었다.
 
'모두의 토론회'는 국민 의견을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한 범부처 정책 소통 행사로, 이날 토론회에는 사전 모집을 통해 선정된 국민 200여 명과 문화유산·역사·한글·도시경관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1월 최휘영 문체부 장관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 설치 검토안'을 보고하면서 본격화됐다. 기존 한자 현판을 그대로 둔 채 그 아래에 한글 현판을 추가해 이른바 '쌍현판'을 설치하는 방안이다.

토론회에 앞서 진행된 사전 의견수렴에서는 원형 보존에 무게가 실렸다. 행안부 '소통 24' 플랫폼 등을 통한 조사 결과 응답자 2199명 가운데 76%가 "문화유산은 원형 보존이 원칙"이라고 답했고, "광화문에 한자 현판만 걸자"는 응답은 60%로 나타났다.
 
댓글 772건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한 결과에서도 '역사적·문화적 가치 보존'을 강조한 의견이 58%로 가장 많았고, '현대적 활용과 조화'가 24%, '한글 병기의 필요성'을 제기한 의견이 18%로 뒤를 이었다.

첫 발제를 맡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상열 문화예술정책연구실장은 광화문 현판 논의가 경복궁 복원 과정과 문화유산 보존 원칙, 한글의 국가 상징성이 맞물린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광화문 현판 문제는 단순한 문자 표기를 넘어 문화유산의 진정성과 국가 정체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논의"라고 말했다. 그는 의견수렴 결과 찬성 측은 한글의 국가 정체성과 상징성,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강조한 반면, 반대 측은 문화유산 원형 보존과 역사성 유지를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찬성 측 발제자인 세종국가경영연구원 박현모 원장은 한자 현판은 유지하면서 아래에 한글 현판을 추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박 원장은 "한자 현판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해 과거의 역사를 지키면서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치와 미래세대의 유산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광화문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자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대한민국의 얼굴"이라며 "한글 현판 병기는 역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 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원장은 또 "광화문 한글 현판 병기에 많은 이들이 반대하고 있는데, 세종께서 보시면 굉장히 슬퍼하셨을 것"이라며 "기존 현판을 훼손하자는 것도 아니고, '광화문'이라는 세 글자를 하나 더 달자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반대할 일이냐"고 반문했다.

반대 측 발제자인 한국전통문화대  김현경 국가유산관리학과 교수는 한글의 가치에는 공감하면서도 현판 추가에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김 교수는 "현판은 단순한 표지판이 아니라 건축물의 상징성과 중심성을 응축하는 요소"라며 "한글 현판을 추가하면 광화문의 정면 구성이 달라지고, 이는 기존의 역사적·건축적 의미를 훼손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현판은 광화문의 중앙축에 놓여 하나의 시각적 중심을 형성하지만, 두 개의 현판을 설치하면 중심이 분산된다"며 "한자 현판은 조선의 문자생활과 궁궐 건축문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요소다. 광화문이 한국의 유산이라는 사실은 현판에 쓰인 문자가 한글인지 한자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싶다는 취지가 문화유산의 형상을 변경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며 현판 추가 대신 전시·해설·교육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글의 가치를 알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어진 패널토론에서도 찬반 논리가 팽팽하게 맞섰다. 한글문화연대 정재환 공동대표는 "광화문은 대한민국 역사·문화의 중심이자 한글의 탄생지"라며 "경복궁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곳이고 광화문은 왕이 백성과 소통하던 공간인 만큼 이제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한글의 가치를 보여줄 때"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판이 건물과 달리 교체하거나 여러 개를 함께 걸 수도 있는 대상이라며 화성행궁과 부석사 등의 사례를 들었다. 정 공동대표는 "한자 현판을 떼자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고 한글을 함께 표기하자는 것"이라며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한글의 가치를 세계인에게 알리는 상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맞서 중앙대 배웅규 도시시스템공학전공 교수는 "문화유산의 진정성과 한글의 상징성은 모두 중요한 가치지만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며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문화유산인 만큼 원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한글의 가치는 집현전 복원이나 광화문광장 콘텐츠 강화 등을 통해 알릴 수 있다고 제안하며 "문화유산의 활용은 원형을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광화문 현판은 그동안 여러 차례 교체됐다. 6·25 전쟁으로 현판이 소실된 뒤 박정희 정부는 1968년 박 전 대통령의 친필을 새긴 한글 현판을 내걸었으나, 이 현판은 노무현 정부 때 철거됐다. 2010년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되살린 한자 현판이 복원됐지만 이후 균열과 색상 고증 오류가 지적됐고, 2023년 월대 복원과 함께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를 새긴 현재의 한자 현판이 설치됐다.

토론회 오후 순서에서는 국민 참여자들이 소그룹으로 나뉘어 의견을 나누고 현장 투표를 통해 찬반 의견을 수렴했다. 정부는 이날 제시된 의견을 정책 검토 과정에 참고할 계획이다. 문체부는 누리집에 의견 게시판을 열어 국민 여론을 추가로 수렴하고 전문가 의견 조사와 대국민 설문조사도 이어갈 방침이다.

윤호중 행안부 장관은 인사말에서 "광화문 현판 한글 병기 문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라며 "결론을 미리 정해놓기보다 서로 다른 생각을 충분히 듣고 토론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휘영 장관은 축사에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오늘 토론회에 참여한 국민 여러분의 고견을 고르게 균형 있게 살피겠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이번 토론회를 시작으로 모두의 토론회를 이어간다는 방침으로, 다음 달 두 번째 토론회 주제는 '에스컬레이터 한 줄 타기냐, 두 줄 타기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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