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성 조항 두고 "사기적인 안"…'탄소중립법' 회의록 보니

여야 '정부 재량권' 조항 충돌…삭제 대신 산업계 지원 절충
2040·2045 감축목표는 법률 명시…탄소예산은 추후 논의
환경단체 "헌재 취지 후퇴"…8월 본회의 처리 전망

연합뉴스

정부의 2040·2045년 중장기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담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 개정안이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 전체회의로 넘어갔다.

여야는 감축목표를 2018년 대비 각각 69~80%, 84~90%로 법률에 명시하되, 정부가 이보다 목표를 낮출 수 있다는 우려를 낳은 단서조항은 삭제하기로 했다. 대신 산업계의 저탄소 전환을 위한 대규모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 지원 조항을 법에 넣기로 합의했다.

기후환경단체에서는 감축목표 자체가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CBS노컷뉴스는 개정안 심사 당시 회의록을 확보해 여야 합의 과정을 들여다봤다.

감축목표 낮출 여지 둘까…'단서조항' 놓고 격론

CBS노컷뉴스와 진보당 정혜경 의원실이 24일 확보한 기후특위 탄소중립기본법심사소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여야는 지난 22일 2040년과 2045년 감축목표 하한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한 단서조항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제출된 정부안에는 '2040·2045년 감축목표 하한을 69%와 84% 이상으로 정하되 국민 경제의 영향, 감축 수단의 확보 수준 및 이행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담겨 있었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범여권에서는 법률에 하한을 명시하더라도 정부가 이 조항을 근거로 감축목표를 더 낮출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조국혁신당 서왕진 의원은 "지금 정부안대로라면 상한 목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실질적인 하한 목표조차 나와 있는 수치보다 더 낮출 수 있는 것으로 설정돼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약간 사기적인 안"이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소영 의원도 "여러 가지 시대의 변화가 생긴다면 그때 국회가 법을 개정하면 되는 것"이라며 "정부가 임의로 판단해서 재량껏 바꿀 수 있다면 국회가 이걸 입법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국민의힘 기후특위 위원들은 단서조항을 유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의 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중동 정세 불안 등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정부가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여지를 둬야 한다는 취지다.

국민의힘 김소희 의원은 "글로벌 에너지 전쟁, 호남 반도체 등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으니 법 안에서 유연성을 좀 보장하자는 취지"라며 "볼록형 (감축경로)로 가지 않으려면 단서조항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당 이종배 의원도 "(2040∙2045 감축목표) 하한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다면 여지를 둘 필요가 있지 않겠나"라며 "김소희 위원이 말한 조건 부여에 대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유연성 조항 빼고 산업계 R&D·설비투자 지원 넣어

여야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박지혜 소위원장은 국민의힘 간사인 김소희 의원에게 별도 협의를 요청했다. 협의 결과 여야는 정부의 재량을 넓힐 수 있다는 지적을 받은 단서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국민의힘이 요구한 대규모 R&D와 설비투자에 대한 재정적·행정적 지원 내용을 법률에 반영하기로 합의했다.

박 위원장은 회의를 속개한 뒤 "유연성 조항을 삭제하기로 양당이 합의했다"며 기존 탄소중립기본법 조항(제8조 5항)으로도 정부가 중장기 감축목표를 변경할 수 있다는 점을 국민의힘 측이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산업계의 저탄소 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대규모 R&D 및 설비투자에 대해 재정적·행정적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해 추진해야 한다'는 부대의견을 법 (조항)으로 올리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간사 간 협의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여야는 산업계 지원 방안을 부대의견에 그치지 않고 법률에 직접 담기로 했다. 장기 감축목표의 법적 구속력을 확보하는 대신 산업계가 감축 과정에서 부담해야 할 비용을 정부 지원으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절충한 셈이다.

'탄소예산 법제화'는 후속 과제로

또 다른 쟁점이었던 탄소예산 개념의 법제화는 후속 과제로 남겨졌다. 정부와 국회는 신설 예정인 국립기후과학원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탄소예산을 법률에 반영할지를 추후 논의할 계획이다. 탄소예산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앞으로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의 총량을 뜻한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이호현 2차관은 정부안을 보고하면서 "탄소예산과 관련해 현시점에서 정의 규정을 신설하거나 감축목표 설정 시 고려 사항에 추가하는 것은 정부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립기후과학원이) 연구∙분석을 하고 관련된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을 토대로 우리나라 잔여 탄소 배출 총량에 대한 연구∙분석을 하고, 이를 추후 법제화하는 방안을 정부안에 반영했"고 설명했다.

이번 개정안은 2031년 이후 감축목표가 법률에 규정되지 않아 발생했던 법적 공백을 해소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감축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산업계의 부담과 경제 여건을 지나치게 고려해 미래세대에 감축 책임을 떠넘겼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는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2030년까지만 정한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2050년까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온실가스 감축을 담보할 실효적 장치가 없다며, 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해 이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환경단체 "헌재 취지에 배치…본회의서 바로잡아야"

지난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연 헌재결정 이행과 탄소중립법 개정을 위한 제헌절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과학적 사실과 국제적 기준에 근거한 장기감축경로를 법률로 마련할 것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개정안 의결 이후 기후환경단체에서는 장기 감축목표의 하한과 감축경로가 헌재 결정 취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기후환경단체 플랜1.5는 논평을 내고 "기후위기로부터 국민과 미래세대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장기 감축경로를 설정할 것을 요구한 헌법재판소 기후소송 결정의 취지에 명백히 배치되므로 이를 강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어 "국회 본회의에서 위헌적 합의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며 "2031~2049년 장기 감축경로를 미래에 과중한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 조기 감축경로의 형태로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경단체들은 2040년과 2045년의 특정 시점에 대한 감축률만 제시해서는 중간 연도의 감축 속도를 담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초기 감축을 미룬 채 목표연도에 가까워질수록 감축량을 급격히 늘리는 경로도 가능해 헌재가 지적한 미래세대 부담 전가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번 개정안은 기후특위 전체회의와 법제사법위원회 의결을 거쳐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조정식 국회의장은 28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탄소중립기본법 개정안의 본회의 처리 시한으로 8월 말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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