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빵 껍질

[조중의의 가장자리톡]

조중의 교수 제공

이른 오전 srt 고속열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뒷좌석의 남자 손님이 그의 아내와 주고받는 말이 불쑥 들린다.
 
"이제 눈이 보이네."
남쪽에서는 볼 수 없던 눈이다.
"와 멋있다! 태백 눈꽃축제 가고 싶다."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설렌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한다.
"나아야 가지."
남편의 목소리는 작지만 따뜻하다.
 
열차는 천안아산역을 지나고 있다. 그들 부부의 대화를 듣고는 창밖을 보니 이틀 전 내렸던 폭설이 과수원을 하얗게 덮고 있다. 눈 위의 거무튀튀한 사과나무들이 척후병처럼 서 있다. 가지 틈으로 내려온 햇빛이 얼어붙은 눈밭을 용접 토치에서 뿜어지는 희고 푸른 화염처럼 날아다닌다.
 
그들 부부는 눈이 내리지 않은 남쪽 지방, 대구나 포항에서 열차를 탄 것 같다.
 
잠시 조용하더니 여자의 감탄사가 다시 들려온다.
"대단하다 대단해!"
"대단하네!"
남자는 아내 말에 오롯이 공감한다.
 
대화를 들어보니 여자는 서울에 있는 상급병원으로 가는 중이다. 남편이 보호자다. 아픈 아내이고 수심 가득할 남편이지만, 하얀 눈 세상을 보면서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지금의 자리를 빠져나간다. 그들만의 위로의 방식일 수도 있겠구나!
 
"행복했지. 참으로 행복했어!"
"애기동백꽃처럼 향기로운 신이 돌아온 것 같았어."
 
언젠가 다녀왔던 태백 눈꽃축제의 눈부신 시간을 고스란히 되찾은 것 같았다. 싱그러운 추억을 떠올리면서…… 병이 나아 눈꽃축제를 찾아가는 눈보라 길을 상상을 하면서……
 
열차가 병원이 있는 서울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음에 쌓인 수심처럼 눈의 높이가 더해간다. 그들 부부의 대화는 끊어졌다. 아마 깜박 잠든 것일 수도 있다.
 
그들처럼 눈을 감으니,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안 그런 척 애쓰지만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눈처럼 얼어붙는다.
 
아! 낯선 사람의 대화 한 토막이 새의 모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양식이 되는구나. 얼굴도 모르는 승객, 뒷자리의 부부가 이 시간 나의 주인이로구나.
 
새벽에 잠을 깼다. 옆 침상에 입원한 70대 노인 때문이다.
 
"종규야! 쌌다!"
 
짧지만 애절한 목소리다. 기저귀에 똥을 눈 것이다. 40대 아들이 조곤조곤 아버지에게 말한다.
 
"왼쪽으로 누워봐요."
 
똥 묻은 기저귀를 빼내는 것 같다. 티슈로 항문 주변을 닦아내고 물뿌리개로 다시 한번 닦아낸다. 새 기저귀를 끼운다. 냄새가 커튼 사이를 지나 내 침상 주변을 맴돈다.
 
"종규야! 네가 서너 살 때는 새벽잠을 자다가 '아빠. 쌌어요!' 하고 나를 깨웠잖아…… 이제 신세가 바뀌었구나. 내가 너한테 똥 쌌다며 새벽잠을 깨우는구나……"
 
똥을 싼 노인은 오늘 대장암 수술을 한다. 그가 수술 후 중환자실로 들어가고 늦은 밤 다른 환자가 입원했다.
 
새로 입원한 환자는 뇌종양 수술 후 석 달쯤 지나면서 수술 부위에 통증이 시작됐다. 세포가 썩어가는 괴사로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늦은 밤 병실로 입원했다. 50대 초반인 환자는 통증이 올 때마다 엄마를 부른다.
 
"당초에 서울로 왔어야 하는데…… 지방에 있는 병원에서 자기들도 수술할 수 있다고 해서……"
 
그의 아내가 이마에 주름을 더하며 한탄을 한다.
 
그는 종일 엄마만 부른다. 아내가 곁에 있는데도…… 통증이 심해지면 섬망이 찾아와 옆에 엄마가 있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아이고! 아파! 아파! 엄마! 나 죽는 거야?"
"죽긴 왜 죽어! 엄마가 있잖아"
 
아내가 침상 곁에 앉아 엄마가 된다.
 
간호사가 밤새 통증을 호소하며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대던 그를 새벽에 관찰실로 옮겼다.
 
생수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자 먹다 남겨둔 바게트 반쪽이 바깥으로 떨어진다. 봉지를 열고 바게트를 꺼내 보니 껍질이 토막 난 나무처럼 단단하다. 중간을 자르니 속살이 보인다. 껍질과 달리 속은 촉촉하고 부드럽다.
 
조중의 교수 제공

열차를 타고 올라온 부부는 어떻게 됐을까? 새벽에 똥을 싼 노인은 대장암 수술 후 퇴원했을까? 괴사로 통증을 호소하며 엄마를 부르던 50대 뇌종양 환자는 섬망에서 깨어났을까?
 
일기예보에서는 종일 눈비가 섞여 오고 북서풍이 강할 거라고 한다. 몸이 오싹해진다. 경계를 넘으면 기후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변한다. 딱딱한 빵 껍질도 경계를 지나면 부드러워진다. 그걸 은총이라고 한다. 굳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아니다. 어떤 에너지가 우리의 생애를 간섭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가 은총 속에 살지 않으면 지옥에 사는 것과 같다.
 
병실 유리창이 갑자기 소란해졌다. 쌀알 같은 우박이 쏟아진다. 마른 벚나무 가지가 휘청거린다. 침상에 걸터앉아 딱딱한 빵 껍질을 뜯어낸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꺼내 입에 넣는다. 씹을수록 달다.
 
조중의 교수 제공

※ 외부 필진 기고는 CBS노컷뉴스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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