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 이겨도 또 싸운다…일제 강제동원 '배상의 벽'

2018년 대법 "일본기업 배상" 확정 판결 다시 한번 확인
소멸시효·청구권 놓고 하급심 엇갈려…헛바퀴에 시간만 허비
승소해도 일본기업 배상 거부하면 국내자산 강제집행해야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고 민문식 씨의 가족과 변호인이 1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본제철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 선고를 마치고 나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광복 81주년을 이틀 앞두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제철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대법원에서 또 확정됐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소멸시효와 재판 절차 등을 둘러싼 다툼이 이어지면서 피해자와 유족들의 법정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2018년 판결 보고 소송 냈는데…1심은 "너무 늦었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2일 고(故) 민문식씨의 자녀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제철이 위자료 총 8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한 원심을 확정했다.
 
민씨는 1942년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제철소에 동원됐다가 약 5개월 만에 현장을 탈출했다. 해방 후 귀국한 민씨는 1989년 세상을 떠났고, 유족들은 2019년 4월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18년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제철의 배상 책임을 최종적으로 인정한 지 약 6개월 만이었다.
 
그런데 2022년 1심은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대법원이 처음 인정한 2012년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하는데, 유족들이 너무 늦게 소송을 냈다고 본 것이다.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은 통상 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소멸된다. 다만 피해자가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면, 해당 사유가 해소된 시점부터 소멸시효를 따진다.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은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려운 객관적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즉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부터 손해배상 청구권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대법원도 2심 판단이 맞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은 앞서 2023년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도 2018년 전원합의체 판결 전까지는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권리를 행사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고 판단한 바 있다.

누구는 "너무 늦었다"…누구는 "재판으로 청구 못 한다"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고 민문식 씨의 장남 민병조(오른쪽 두번째) 씨와 손녀 민사라 씨가 1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본제철 강제동원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 선고를 마치고 나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하급심에서 제동이 걸린 사건은 또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송모씨 등 85명은 지난 2015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 등 17개 전범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이들의 소송을 각하했다.
 
당시 1심은 비엔나협약과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한국만의 해석에 불과하고, 국제적으로는 식민지배 보상 문제를 국가 간 일괄처리 협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논리였다.
 
당시 판결은 2018년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부정한 탓에 논란이 일었다. 결국 서울고법은 2024년 1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다시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문제는 1심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따져보지도 않고 소송을 끝냈다는 점이었다. 항소심이 이를 바로잡았지만, 2015년 시작한 소송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1심은 11년째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에 서류 보내고 80년 전 기록 찾고…절차도 '산 넘어 산'

법정 다툼 못지않게 피해자들이 넘어야 할 현실적인 장벽도 많다.
 
소송의 상대방인 피고가 일본 기업인 만큼 소송 서류를 일본에 보내는 과정부터 물리적 시간이 소요된다. 80여년 전 일어난 강제동원 피해를 법정에서 확인하기 위한 자료를 확보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송씨 등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강길 변호사는 "피고에게 송달이 잘 안 되고 국가기록원에 있는 자료를 찾기도 힘들다"며 "피고가 수십 곳에 이르는 사건은 법원에서 한꺼번에 심리하기 어려워 사건을 나눠 다시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사건은 피해자마다 일했던 기업과 공장, 동원된 시기 등이 다르다. 피해자가 이미 숨진 경우에는 유족들이 남아 있는 기록 등을 토대로 수십 년 전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재판을 시작하기 위한 서류 송달부터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시간이 더해지면서, 대법원이 큰 틀의 법리를 정리한 뒤에도 개별 소송은 수년씩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에서 이겨도 끝 아니다…마지막은 '실제 배상'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도 마지막 문제가 남는다. 실제로 배상금을 받는 일이다.
 
일본 기업이 확정판결에 따라 스스로 배상금을 지급하면 끝나지만, 이를 거부할 경우 피해자가 기업의 국내 재산을 찾아 강제집행에 나서야 한다.
 
민씨 유족도 항소심에서 승소한 뒤 일본제철이 국내 합작회사 PNR에 보유한 주식을 압류하는 절차에 나섰다. 일본제철이 판결에 따라 직접 배상하지 않을 경우 이 주식을 현금화해 배상금을 받기 위한 것이다.
 
유족과 대리인단은 대법원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제철에 확정판결을 받아들이고 직접 사과·배상할 것을 촉구했다.
 
민씨의 아들 민병조씨는 "아버지 생전에도 구제받고 보상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길이 없었다"며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예를 살리고자 했는데 오늘 좋은 결과가 나와 상당히 좋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제철을 향해 "이런 부분을 잘 수용해서 빠른 시일 내에 사과와 보상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온 지 8년.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대법원의 법리는 이제 여러 차례 확인됐지만,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 배상을 받기까지는 여전히 긴 시간이 걸리고 있다.
 
1942년 일본제철의 제철소에 동원됐던 민씨가 세상을 떠난 지 37년이 지난 지금, 그가 받지 못한 배상을 받기 위한 싸움은 자녀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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