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일본 두들겨 패는 놈은 나 하나"…욕쟁이 할머니의 불호령

[싸움꾼 할머니들①]
군수공장 간다 속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된 황금주
"국회의원 두들겨 패고 데굴데굴 구르는 여자 나밖에 없어"
20여 개국서 증언…외국선 '청춘 돌려달라는 할머니'
수요시위서 "조선 XX들이 더 나빠"…한국 정부에도 호통
"내 아픔 알아줬으면"…'황금주 대 재팬', 美법정에 세워

2002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황금주 할머니가 증언하는 모습.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단독]"일본 두들겨 패는 놈은 나 하나" 욕쟁이 할머니의 불호령
(계속)

"어머나, 저 개XX가. 내가 지 말을 안 들으면 죽고도 남는다는 거야. 내가 무슨 죽고도 남을 일을 했나."

고(故) 황금주 할머니는 1941년 군수공장에 간다는 말을 믿고 나섰다가 중국 길림의 군부대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위안소에서 옷을 벗으라고 강요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개XX"라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할머니는 당시를 떠올리며 "겁이 나서 달달달달 떨렸다"고 말했다. "난 못 벗겠다"며 버티다 일본군에게 발로 차이고 칼에 찔리기도 했던 할머니는 해방 직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국밥집과 방직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며 삶을 이어갔다.

1991년 황금주 할머니는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나섰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욕쟁이 할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수요시위 도중 화가 나면 일본대사관 앞으로 달려갔고, 일본과 미국까지 찾아가 "정신 차려라"라고 호통쳤다. 거친 욕설과 불호령, 그것이 황금주 할머니가 일본의 사죄와 청춘을 돌려받기 위한 싸움의 방식이었다.

'데굴데굴 구르는 여자'…황금주의 격렬한 항의

2000년 3월 1일 제400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황금주 할머니의 모습.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제공

"일본 정부에서 그래도 내가 가서, 국회의원 두들겨 패는 놈 나 하나밖에 없어. 국회의원 여자 두들겨 패고 국회의원 두들겨 패고 국회 가서 데굴데굴 구르는 여잔 나밖엔 없어.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정부는 안죽(아직)까지도 일본놈들한테 매달려서 지랄한다고. 일본 놈 말이라면 꺼뻑 돼져. 그 왜정 때 그만큼 저걸 했으면(매달렸으면) 당당한 기운이 있어야 할 텐데 없어 지금까지도."

황금주 할머니는 2002년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증언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초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한국 정부도 소극적으로 대응하자, 할머니의 항의는 더욱 격렬해졌다. 국회의원을 향해 거친 말을 쏟아내고 때로는 바닥을 구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 나가서 92년도 그 사람한테 가서도 그랬어. '일본서 사죄하고 사죄에다가 내 청춘 돌려주시오 그렇게 말해주시오' 그랬다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청춘을 어떻게 돌려줍니까 청춘은 난 돌려주면 받습니다. 근데 돈은 그 씨알따나 안 받습니다' 이랬다고. 그래서 외국 나가면 '아 그 청춘 돌려달라는 할머니' 그럼 다 알아. 내 이름 부르면 잘 몰라."

60대부터 70대까지 고령의 나이에도 할머니는 도쿄와 오사카, 워싱턴과 뉴욕, 토론토 등 세계 20여 개국을 찾아 증언을 이어갔다. 해외에서도 할머니의 호통은 이어졌고, 그는 이름보다 '청춘 돌려달라는 할머니'로 불리기까지 했다.

2001년에는 역사 왜곡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해 일본 문부과학성 관리들에게 삿대질을 하며 "너희들 일본이 교과서에 군위안부 문제를 넣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다"면서 울분을 토했다.

황금주 할머니의 거침없는 발언은 수요시위에서도 계속됐다. 2004년 1월 14일 592차 수요시위에서 할머니는 마이크를 잡고 성큼성큼 걸어 나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에게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라며 욕설과 함께 거친 말을 쏟아냈다.

"이 개XX들아. 이 조선 XX들 더 나빠. 대통령보다 더 나쁜 국회의원들. 너희 엄마, 할머니야 이 개XX들아. 할머니들 우습게 보고 이 추운데도 나와서 이렇게 하니까 재밌지? 이 개가 뜯어먹어도 미친 개가 뜯어먹을 놈들아. 일본 놈들 다 올여름에 날벼락 맞아 뒤지기 전에 이 개XX들아 알아서 해."

말은 거칠었지만, 추운 날씨에 붉게 얼어붙은 얼굴에는 떨림과 동시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할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Hwang vs. Japan', 일본을 미국법정에 세우다

1992년 미국을 찾아 증언 등 활동을 하는 황금주의 모습.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제공

"다른 할머니랑 좀 차원이 다른 에너지였어요. 그냥 갑자기 화가 나시면 달려가세요. 일본 대사관 앞으로."

1995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함께해 온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김동희 관장은 황금주 할머니를 이렇게 기억했다. 황금주 할머니의 거침없는 행동은 국내를 넘어 국제사회로 이어졌다.

"이렇게 외국을 21개국을 돌아다니고 갔다 온 거 정말로 말도 못해 그 고상(고생)이라는 건 정말 이런 말도 못해. 이렇게 나와 다 얘기를 하니까 덜 속상해. 그 전에는 내가 속이 상해서 밥을 못 먹었어. 가슴이 뛰고 뽀개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제 지금 밥을 먹어."

1992년 8월 황금주 할머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소위원회에 참석해 한국인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유엔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2000년에는 한국과 중국, 대만, 필리핀 출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14명과 함께 미국 연방지방법원(US District Court for the District of Columbia)에 일본 정부를 제소했다.

이 집단소송은 'Hwang v. Japan(황금주 대 일본)'으로 불렸다.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과 사과, 관련 문서 공개 등을 요구했다. 또 일본 정부의 행위가 외국인불법행위손해배상청구법과 강요된 성매매 및 강간 금지 규범에 위배된다는 확인판결도 청구했다.

소송은 결국 각하됐지만, 황금주 할머니의 증언과 끈질긴 활동은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황금주 할머니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수없이 증언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힘을 보탰다.

할머니의 열정에 대해 김동희 관장은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자리도 '나라면 갈 수 있어. 내가 허락하는 한 가겠다'며 나서는 용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내 이야기를 사람들이 좀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성격이 급하다 보니 먼저 나오는 것은 욕과 정리가 안 되는 말들이었다"며 "결국 자신의 아픔을 누군가는 계속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한 극우 성향 단체가 평화의 소녀상 옆에서 "위안부는 가짜"라는 망언을 쏟아내며 철거를 요구했다. 해당 단체의 대표는 사자명예훼손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움직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한국인까지 역사를 부정하고 망언을 하는 것을 황금주 할머니가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부럴. 정신차려라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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