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를 밑도는 식량자급률과 기후변화, 국제 분쟁 등으로 식량안보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국가 차원의 식량안보 위기 대응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식량안보와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연간 최대 31조6천억원으로 추산됐다.
15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에 따르면 연구원은 최근 한국형 식량안보 지표를 개발하고, 식량안보 위기 상황을 단계별로 판단·대응하는 국가 차원의 대응체계 구축 방안을 제시했다. 연구 결과는 지난 12일 서울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식량안보 가치와 현주소, 대응 방향 정책토론회'에서 공개됐다.
유찬희 KREI 연구위원은 국내 생산기반 확보와 공공비축, 수입 안정성 확보, 식량 접근성 보장에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더한 식량안보의 경제적 가치가 연간 최대 31조 6천억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국내 생산기반과 공공비축의 가치는 약 4조원, 수입 안정성 확보는 약 1조 9천억원, 공급 충격 때 국민의 식량 접근성을 보장하는 가치는 최대 5조 9천억원으로 추산됐다. 농업의 홍수 조절과 수질 정화 등 공익적 기능의 가치는 연간 약 21조원으로 평가됐다.
KREI는 식량안보를 단순 자급률이 아니라 국내 공급 기반과 해외 도입 기반, 식량 접근성 등 3개 축과 지속가능성을 함께 보는 '한국형 식량안보 종합지수'로 평가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지표별 가중치는 국내 공급 기반 60.2%, 식량 접근성 21.9%, 해외 도입 기반 17.9% 순이었다.
승준호 KREI 곡물경제연구실장은 우리나라가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 수요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고 농업 인력 고령화로 미래 생산 잠재력도 약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2024양곡연도 전체 곡물자급률은 21.6%에 그쳤고, 쌀은 96.0%였지만 콩은 10.8%, 밀과 옥수수는 각각 1% 안팎에 불과했다.
여기에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식량 위기의 성격도 달라졌다고 봤다. 과거에는 국제가격 상승이 주요 위험이었다면 최근에는 재고가 있어도 공급망 교란으로 필요한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가 커져 가격과 물량을 함께 보는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스위스와 일본 등은 이미 국가 차원의 식량 위기 대응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스위스는 1935년부터 민간비축을 중심으로 대응 시스템을 운영하며 설탕과 쌀, 커피, 식용유, 곡물, 사료곡물 등을 일정량 이상 수입·판매하는 기업에 의무비축을 맡기고 있다. 일본도 지난해 4월부터 '식량공급곤란사태대책법'을 시행해 위기 징후 단계부터 정부 대책본부를 설치하고 공급 확대와 생산·수입 조치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KREI는 우리나라도 식량 위기를 0~3단계로 나누는 정량적 판단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물량과 가격이 모두 안정적인 평시를 0단계로 두고, 1단계는 일부 품목의 일시적 가격 상승, 2단계는 1~2개 품목의 공급량이 평년 대비 20% 이상 감소하는 상황으로 설정하는 방식이다. 가장 심각한 3단계는 1년 이상 2개 이상 품목에서 심각한 공급 부족이 발생해 1인당 하루 공급 열량이 1850㎉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로 제시했다.
위기 때 집중 관리할 품목으로는 유지류와 쌀, 축산물, 밀가루, 설탕, 두류를 제시했다. 이들 품목은 2023년 기준 국민 1인당 공급 열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대응 조직도 단계별로 달리 운영하는 방안이 제안됐다. 1~2단계에서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식량 위기 대응위원회'를 중심으로 수입·생산 촉진과 비축물량 방출에 나서고, 3단계에서는 국무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식량 위기 대응본부'를 가동해 증산과 식량 배급, 가격 통제 등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평시 비축부터 위기 단계별 대응조치와 국민의 식량 접근권 등을 규정한 별도의 '식량안보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업계가 참여하는 '식량 위기 대응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한편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4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7.9%다. 2020년 49.3%에서 2021년 44.1%로 떨어졌다가 2022년 49.4%, 2023년 49.3%로 회복했지만 다시 50% 아래로 내려왔다. 농식품부는 식량자급률 목표를 55.5% 이상으로 높이고 연내 식량안보법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