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경찰은 전남경찰 수장으로, 일제 판사는 대법관으로

친일인명사전 전남광주 출신 인사 162명 등재
나주 출신 노주봉, 항일운동 탄압 뒤 해방 직후 전남경찰 수장
담양 출신 고재호, 독립운동 관련 유죄 판결 뒤 해방 후 대법관
"후손 비난에 그쳐선 안돼…기록 통해 호국보훈 돼야"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광복 81주년을 앞두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전남광주 출신 인사들의 행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전남광주 출신 인사는 모두 162명으로 법조와 치안, 종교, 교육, 군, 문화·예술 등 각계에 걸쳐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탄압에 관여한 나주 출신 경찰 노주봉은 해방 직후 전남경찰 수장에 올랐고, 담양 출신 판사 고재호는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뒤 해방 후 대법관까지 지냈다.

14일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전남광주 출신 등재 인사 162명은 관료와 경찰, 법조, 교육, 군, 종교, 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일제의 사법·치안기관에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탄압에 관여한 뒤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 법원과 경찰 등 국가기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은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항일운동 대규모 검거 노주봉…해방 직후 전남경찰 수장까지

대표적인 인물이 전남광주 나주 출신의 경찰 노주봉이다.

1900년 나주에서 태어난 노주봉은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 목포경찰서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전남경찰부 보안과와 고등경찰과 등에서 근무하며 순사부장과 경부보, 경부 등으로 승진했다.

특히 1934년 전남경찰부에서 비밀결사인 전남운동협의회 관련자들을 대규모로 검거할 당시 전남 각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을 총동원해 검거를 지휘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돼 있다.

1938년에는 광주경찰서 경부로 자리를 옮겨 병사·방공주임과 광주 방공감시대 부장을 맡았다.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사행동 지원과 병력 동원, 방공 업무 등을 수행한 공로로 1940년 일제로부터 훈8등 서보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노주봉의 경찰 경력은 광복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정 아래에서 전라남도경찰위원장인 도경찰부장에 임명돼 전남경찰의 수장을 맡았다. 일제 경찰로 항일운동 탄압과 전시 동원 업무에 관여했던 인물이 해방 후에도 지역 치안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노주봉은 다만 취임 한 달여 뒤인 같은 해 10월 광주청년단 행동대원들에게 친일파로 지목돼 피살됐다.

일제 판사 고재호, 독립운동가 유죄 판결 뒤 대법관

담양 출신 고재호의 경우 일제강점기 판사로 재직한 뒤 해방 후 대한민국 대법관까지 올랐다.

1913년 담양에서 태어난 고재호는 광주공립중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39년 조선변호사시험과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후 대구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관련 사건들의 재판에 참여했다.

1943년에는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혐의 등으로 기소된 심재인·박근철 등 13명의 재판에 참여했고,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모임을 가졌다가 기소된 박철림·조병옥·김동윤 등의 재판에서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국광복군에 가입해 활동하다 기소된 고형림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 재판에도 참여했다. 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한글 습득을 권유했다가 기소된 손문익의 재판에도 판사로 참여했다.

고재호 역시 해방 이후 사법부를 떠나지 않았다. 1945년 10월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시작으로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와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장 등을 거쳐 대법관까지 지냈다. 이후 서울변호사회장과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등 법조계 주요 보직도 맡았다.

역사학자들은 해방 직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친일 청산의 영향이 현재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또 친일 행적에 대한 기록이 단순히 당사자의 후손을 비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친일 행적과 해방 이후의 행적을 제대로 기록하고, 독립운동을 비롯한 항일운동에 나섰던 인물들과 그 후손들을 기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해방 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통해 친일 청산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면서 친일 인사들이 해방 이후에도 경찰과 법조계 등 주요 영역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었다"며 "제때 정리하지 못한 친일 행적을 지금이라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이 역사 정의를 세우는 데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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