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거다. 그래서 외로운 거야. 하지만 외로움은 우리를 강하게 키워줄 거야.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민중의 적' 제5막 中)
'민중의 적(An Enemy of the People)'(1882)은 근대극의 선구자, 헨리크 입센의 숨은 문제작이다. 불편한 진실을 들추려는 한 사람과 이를 저지하려는 다수의 대립은 한세기 이상이 흐른 지금 봐도 시사점이 많다.
작품은 마을의 핵심 자원인 온천수가 공장 폐수로 오염된 사실을 인지한 스토크만의 고독한 싸움을 다룬다. 그는 "썩어빠진 도덕 위에 사회를 건설하면 사회 전체가 썩어 버린다"며 "온천물은 오염됐다"고 외치지만, 주민들은 "한마디만 더 하면 가만 안 둔다"며 돌을 던진다. 수입원을 잃을 생각이 없기 때문. 당초 "언론과 시민은 내 편일 것"이라며 자신만만해 하던 스토크만은 끝내 만장일치로 '민중의 적'으로 규정된다. 이후 집도 망가지고 직업도 잃지만, 그럼에도 '공공의 적'으로 남길 택한다는 게 작중 결말이다.
수박, 또는 배신자…'민중의 적'은 좌표 찍기가 일상화된 한국 정치에서도 다양하게 변용되는 중이다. 이 외로운 단어를 떠올리게 된 건 최근 국회 앞에서 진행된 1인 기자회견을 보면서다. 주인공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퇴진 서명 운동을 주도해 온 책임당원 박인규씨. 현재 장 대표 지지자들은 또 다른 당권 주자들이 그의 배후에 있다는 '사주설'을 퍼뜨리거나, "알고 보니 좌파"라며 린치 중이다.
미운털이 박힌 이유는 박씨가 지난 11일 장 대표의 거취 문제를 '전 당원 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해서다. 당내에서 꾸준히 분출한 사퇴론의 가부를 깔끔하게 결판내자는 취지다. 지선 때 후보들의 '장동혁 보이콧'이 보여줬듯 현 체제로는 총선 승리도, 보수 재건도 가망이 없다는 문제의식의 발로기도 하다.
그는 장 대표가 '윤 어게인' 세력에 기대 정치적 입지를 구축해 왔다고 지적하며 "비판자에겐 징계의 칼을 들이대고 '자신에게 줄 서기'와 충성 경쟁을 강요하는 정치, 이것이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수의 모습이냐"고 물었다. 이는 사실 쇄신파를 자처하는 초·재선 의원뿐 아니라, 여의도에서 잔뼈가 굵은 중진 상당수도 공감하는 바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선뜻 나선 이가 없었을 뿐, 내용 자체는 닳고 닳은 주장이란 얘기다. SNS나 사석에서 안전한 비판만 쏟아내는 의원들에게 지친 당원들이 직접 '연판장 돌리기'에 나선 배경이다.
박씨는 장 대표를 향해 "정말 당원 지지를 받고 있다고 자신한다면 당원들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압박하는 동시에, 중진들이 현 체제를 지탱해 온 '공범'임을 짚었다. 국민의힘의 3선 이상 중진 33명 중 박씨가 보낸 당원·시민 2만 7천 명의 외침에 응답한 이는 (놀랍게도) 한 명도 없었단다. 익명에 숨어 장 대표의 '광복절 올공(올림픽공원)행'을 비판하는 이들조차도 손 안 대고 코풀기만 바라고 있는 셈이다.
왜 나서서 목소리를 내지 않느냔 기자의 질문엔 말을 아끼고, 장 대표 연임 시나리오를 체념적으로 수용하는 한 중진을 보며 당이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을 알 것 같았다면 비약일까. 장 대표만 탓할 일이 아니다. 아니, 그럴 때는 지났다.
박씨의 장외 회견에서 가장 눈에 띈 건 "내년은 너무 길다!"가 적힌 현수막을 함께 들어준 시민과 당원들이다. 박씨는 당초 현역 의원을 껴야 대관이 가능한 국회 소통관을 빌렸지만, 회견장 단상에 서지 못했다. 해당 초선 의원이 직전에 '드랍'했기 때문이다. 대체자도 물색했으나, 이름을 걸고 마이크를 내준 국민의힘 의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낮 기온 34도의 땡볕 아래, 땀을 흠뻑 흘려가며 당의 변화를 역설해야 했던 속사정이다.
대학 시절부터 당에 몸담으며 의원실과 대선캠프를 거친 박씨는 "주변에서 '의원들은 뭐하고, 평당원인 네가 이런 일을 하느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며 "개인적으로 뭘 바라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정치를 접을 각오도 했다"고 했다. 당내 주류인 의원들이 전면에 못 나서는 이유는, 결국 2가지로 압축된다. '진실'이란 믿음이 없거나, 잃게 될 무언가가 두렵거나. 이처럼 당내 광범위하게 퍼진 침묵의 나선을 타고 장 대표는 취임 1주년 쇄신책을 내놓겠다며 개혁 의제까지 선점한 상태다.
온천이 오염됐다는 것을 깨닫고도 이를 외면한 주민들은 스토크만을 몰아내고 평화를 찾았을까. 스토크만의 목소리가 사라진다고 오염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오염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이 될 공산이 크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가짜 무통(無痛)이 국민의힘(People Power Party)이 그리는 근(近)미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