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절 베이징은 상하이 못지않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1920~30년대 이곳에서 신채호, 이육사, 이회영 선생 등 굵직한 인물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바로 무장독립이다. 베이징에서 활동 중인 재중항일역사기념사업회의 도움을 받아 이들의 발자취를 쫓았다.
상하이와 거리 둔 독립운동가들
3·1운동이 벌어진 이후인 1919년 베이징에는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 같은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다. 이들은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 노선을 반대했다. 미국 등 외세의 힘을 빌려서는 독립을 얻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민족주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졌지만 이들은 무장 투쟁에 뜻을 같이 했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는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 외교를 통한 독립에 주력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일본 등 1차 세계대전 승전국 식민지 국가에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여기에 희망을 걸었다.
신채호 선생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에서 이승만 국무령 후보가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청원을 한 사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면서다. 두 사람이 노선 차이를 두고 갈라선 순간이다.
무장 투쟁론자들이 베이징에 집결한 것은 우선 중국 정부와의 항일투쟁 연대를 위해서다. 또 베이징은 일본 경찰력의 직접적 통제가 약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고, 지리적으로도 만주의 무장 단체와 중국 내륙의 독립운동 단체 간의 다리 역할을 하기에 용이했다.
또 외국 열강의 공관들이 많아 무장독립 투쟁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뭉치자" 비밀리에 꾸린 군사통일 기구
1920년 9월 베이징에 있는 15명의 독립운동가는 '군사통일촉성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만주와 시베리아 등 중국 각지에 흩어진 무장투쟁 세력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다. 단일한 군사지휘 체계를 세우면 더 효율적으로 일본군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여기에서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뿐 아니라 생소한 이름인 박용만 선생이 등장한다. 10개의 무장독립단체 대표를 모아 이듬해 4월 이름을 바꾼 군사통일주비회가 열렸다. 회의 장소는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유동인구가 많은 동물원 내 서구식 건물인 창관루로 결정됐다.
이 회의는 두 달간 18회까지 이어지면서 군사금 모금단체인 '모연대'를 설치했다.
이와 별도로 무장결사 단체인 제2보합단도 조직됐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대한독립보합단'의 베이징 지부였다. 박용만 선생이 단장을 맡았고, 노백린, 김창숙, 신채호 선생 등이 주요 보직을 맡았다.
이 단체는 군자금 모집·전달 등 만주 무장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2보합단은 군사통일주비회의 행동 조직인 셈이다. 독립유공자 황정연 지사의 공훈록에는 보합단과 연계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나온다.
이런 활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이육사 선생 역시 의열단과 긴밀히 교류하며 베이징에서 활동했다.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과 연계된 활동을 한 그는 1926년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대학 상과에서 공부했다.
그는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 건강이 약해졌지만, 1932년 의열단이 난징(南京)에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도 연계해 활동하며 무장투쟁 노선에 공감했다. 시인으로 더 유명하지만 이육사 역시 무장투쟁을 지향했다.
밀정 감시·군자금 모집 실패 등으로 좌절
군사통일주비회는 치열한 논의를 벌였지만,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간도참변으로 한인 사회가 초토화되면서 후방에서의 지원이 끊겼고, 밀정에게 걸려 군자금 모집도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항일역사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대표단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자금이 끊기면서 체류비도 없을 정도로 힘들어졌다"고 전했다.
또 최고사령관 인선과 활동 방법 등을 놓고 이견이 엇갈린 것도 원인이 됐다.
짧은 활동 이후 군사통일주비회는 안창호 선생이 주도한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이 단체 역시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기 위한 취지였다.
신채호, 김창숙 선생 등 주비회 출신들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무장 투쟁 중심의 새로운 정부를 만들자고 요구했지만,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용만 선생은 미국 하와이에서의 경험을 살려 둔전병제(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체제) 형식의 독립군 기지 건설을 시도했지만, 암살당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무장투쟁을 초지일관 주장하던 신채호 선생은 1928년 대만 아나키스트와 군자금 마련을 위한 외국환 위조 사건에 연루돼 여순감옥에 수감됐다. 그는 8년 만인 1936년 감옥에서 순국했다.
뒤늦게 관철된 무장투쟁론
이렇게 좌절됐던 무장투쟁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임시정부 안에서도 힘을 받게 된다.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을 침략한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외교적 노력으로는 독립을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1930년대 중반부터는 김구 선생, 지청천 장군 등 무장 독립파가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 1940년 창설된 광복군은 국내 진공작전을 펴기 위한 미국 OSS(미국 전략사무국)와 합동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김원봉 선생은 1938년 10월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의 대(對) 일본 항전에 참여했다. 4년이 지난 1942년 조선의용대의 상당 병력이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줄기차게 무장 독립을 추구했던 이들의 바람이 먼 길을 돌아 어렵게 이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