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따로, 일자리 따로' 바꾼다…도심 주택공급 규제 전면 손질

현행 21개 용도지역 체계 개편…주거·업무 경계 허문다
빈 상가·업무시설 주택 전환 쉽게…도심 유휴부지도 활용
모듈러 공공주택 2030년까지 2만호…공급기간 30% 단축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의 모습. 류영주 기자

정부가 인공지능(AI) 확산과 1인 가구 증가 등 달라진 산업·주거 환경에 맞춰 도시·건축 규제를 전면 손질한다. 일자리와 주거지를 엄격히 분리해온 기존 도시계획에서 벗어나 토지와 건축물의 용도를 유연하게 바꿀 수 있도록 해 도심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비어 있는 상가와 업무시설의 주택 전환을 쉽게 하고 상업지역의 주거 비율도 높인다. 공장에서 주택을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모듈러 공법을 확대해 공급에 걸리는 시간도 줄인다.

17일 정부에 따르면 지난 13일 발표된 '8·13 주택 공급 대책'에는 이처럼 달라진 산업·주거 구조에 맞춰 주택 공급체계를 개편하는 방안이 대거 포함됐다.
 

일자리·주거지 따로 두던 도시계획 바꾼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어디에는 집을 짓고 어디에는 일자리를 둘 것인가'를 정하는 용도지역제다.

정부는 현재 21개로 세분화된 용도지역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는 공해와 소음 등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공업지역과 주거지역을 분리할 필요성이 컸지만, 지식산업과 사무직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이 같은 구분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성이 줄었다는 판단이다.

오히려 일자리가 밀집한 지역에 충분한 주택을 공급하지 못하면서 장거리 통근과 교통난, 특정 지역의 주택 수요 집중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정부의 문제의식이다.

서울 강남구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말 기준 강남구에서 일하는 취업자는 88만9천명인 반면 강남구에 거주하는 취업자는 12만5천명에 그쳤다. 단순 비교하면 76만4천명의 격차가 발생한다. 일자리와 주거 공간의 불균형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정부는 이에 따라 상업지역에 업무시설이 과도하게 몰리고 주택은 부족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주거·업무시설 균형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공업지역을 다른 용도로 전환할 때 필요한 대체 공업지역을 현재 같은 시·도 안에서만 지정하도록 한 규제도 완화한다. 대체지정 범위를 다른 시·도까지 넓혀 지방정부 간 협력을 통한 주택 공급을 가능하게 할 계획이다.

준공업지역의 유휴부지와 국공유지, 신규 산업단지로 이전하는 공장의 기존 부지 등도 공공이 매입·개발해 주택 공급에 활용한다.
 

빈 상가·업무시설도 주택으로…주거비율 100% 가까이 허용

7일 서울시내 빌라 밀집지역 모습. 황진환 기자

새로 집을 지을 땅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기존 도심 공간을 주택으로 바꾸는 문턱도 낮춘다.

정부는 상가나 업무용 건물을 향후 주거용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구조와 설비 등을 설계하는 '복합용도건축구역'을 새로 도입한다.

이미 지어진 건물을 주택으로 전환할 때 걸림돌이 되는 건축·주차장 기준도 건축위원회 심의를 거쳐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특별법 제정을 추진한다.

주상복합의 주거 비율 제한도 완화한다. 현재 지방정부 조례로 정할 수 있는 주거비율 상한은 90% 미만이지만 이를 100% 미만까지 높여 지역 여건에 따라 사실상 대부분을 주택으로 채울 수 있도록 한다.

상업·준주거지역에서 건축허가만으로 지을 수 있는 주상복합 규모도 확대한다. 현재 300세대 미만인 기준을 2030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500세대 미만으로 높여 사업 절차를 단축한다.

지식산업센터 부지 등 민간이 보유하고 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비주거용지도 도시계획을 변경해 주택 공급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용도 변경에 따른 토지가치 상승이 특정 토지주에게 과도한 이익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만큼 적정 수준의 개발이익을 환수하는 장치도 함께 마련할 방침이다.

주거용 개발이 가능한 토지 가운데 일부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모를 통해 공공토지비축 방식으로 사들인 뒤 직접 주택 공급에 활용한다.
 

땅만 바꾸는 게 아니다…모듈러로 공급 기간도 단축

주택을 지을 수 있는 공간을 늘리는 것과 함께 실제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도 바꾼다. 정부가 주목하는 것은 공장에서 주요 구조물을 제작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모듈러 공법'이다.

모듈러 공법은 공장 제작과 현장 공사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어 기존 공법보다 공사 기간을 줄일 수 있다. 정부는 통상 2년가량 걸리는 공사 기간을 1년 6개월 수준으로 약 30%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 고소작업이 줄어 안전사고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정부는 초기 시장 확대를 위해 공공이 먼저 물량을 늘린다. LH 등을 통한 모듈러 공공주택 발주를 연평균 3천호에서 5천호 수준으로 확대해 2030년까지 총 2만호를 공급할 계획이다.

고층화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실증사업도 추진한다. 내년 11월 준공 예정인 LH 의왕초평 22층 381세대와 내년 2월 착공 예정인 경기주택도시공사(GH) 하남교산 25층 400세대가 시범사업 대상이다.

기술 개발과 품질 향상을 위한 재정 지원, 진흥구역 지정 근거 등을 담은 '모듈러 특별법'도 연내 제정을 추진한다.

국토교통부 장우철 주택정책관은 "AI 시대에는 주거와 일자리 공간을 엄밀하게 분리할 필요성이 옅어졌음에도 경직된 도시·건축 규제로 인해 수요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번 방안에는 도시·건축 규제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전향적인 내용들이 담겼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일회성 규제 완화에 그치지 않고 도시계획 체계 자체를 바꾸는 작업으로 이어갈 방침이다.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범정부 주택 신속공급 점검회의'를 신설해 부처별 이행 상황을 매주 점검한다. 이와 별도로 AI 시대의 산업·주거 변화에 맞는 미래 도시의 모습을 놓고 전문가와 청년층 등의 의견을 수렴한 뒤 2027년까지 용도지역제 개편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결국 정부 구상의 핵심은 주택 공급량을 늘리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어디에 어떤 용도의 건물을 지을 수 있는가'라는 도시계획의 기본 틀 자체를 유연하게 바꾸는 것이다. 일자리와 주거의 경계가 흐려지는 산업구조 변화에 맞춰 도시 공간을 재배치하고, 건축 방식까지 개선해 주택 수요 변화에 보다 빠르게 대응하겠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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