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그 무엇을 포기하면 화려한 변신을 할 수 있을 듯이 설교하는 원수들에게 10년이고 100년이고 제재를 할 테면 하라, 우리는 반드시 자기 힘으로 떳떳하게 보란 듯이 살아나갈 것이라는 단호한 선언을 내리신 절세위인의 초강경 의지"(2026년 8월 24일 노동신문 사설)
북한은 김여정 부장의 담화를 통해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한미훈련 축소조치를 평가절하하면서도 대화여지를 남김으로써 공을 다시 미국에 넘겼다. 이후 북한은 대외매체 등을 통한 추가 반응 없이 숨고르기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에도 지난 2018년 6월 1차 북미정상회담 때 찍은 사진 1장과 2019년 6월 판문점 북미정상회동 사진 2장을 다시 올리면서 러브콜을 이어갔지만 북한은 이에 반응하지 않고 있다. 다만 노동신문은 하루 전 '자력갱생은 주체조선의 불가항력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제제 무용론을 거듭 설파했다.
해당 사설을 트럼프 대통령의 유화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자력갱생 의지를 강조하며 '100년을 제재해도 소용이 없다'고 주장한 대목은 북한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
파병을 통한 북·러 밀착, 이에 자극받은 중국과의 밀착을 통해 대북제재는 적어도 북방진영에서는 무력화됐다.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뒷배를 얻음으로써 지난 2018년과 2019년 북미정상회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갖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따라 미국에 대한 북한의 요구 수준도 올라가고 있다. 김여정 부장은 이미 담화를 통해 한미연합훈련 축소조치를 평가절하하면서 사실상 연합훈련중단을 압박했고, 더 나아가 "주권적 행사"와 "더욱 강한 억제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핵보유국 지위의 인정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화답이라도 하듯 북한이 "핵무기를 57개"를 갖고 있다며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긍정적인 반응이 표면화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24일 밤 이뤄진 조현 외교부장관과 마크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도 북한 핵 문제에 대한 한미공조는 확인됐으나 북한 비핵화는 언급되지 않았다.
핵 무력의 질적·양적 강화와 중국·러시아와의 밀착으로 북한의 전략적 지위가 올라간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를 위해 북한 핵을 용인하는 발언을 하자, 1차·2차 북미정상회담 당시 '을'이었던 북한의 입장이 이제 '갑'이 됐다는 관측도 나왔다.
2018년과 2019년과 달리 북한이 '칼끝'이 아닌 '칼자루'의 주도권, 꽃놀이패를 쥐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2월 9차 당대회에서 북미대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적대시정책의 철회와 핵보유국 인정 요구 외에도 대화의 장소나 시기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인민대중들 앞에서 '수령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가 깨지는 '하노이 노딜'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김 위원장으로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대통령의 첫 평양 방문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 파병으로 시작된 북한의 전략적 공간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먼저 러·우 전쟁이 끝나면 지금과 같은 수준의 밀착관계가 계속될지 불투명하다. 근원적으로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와 밀착할수록 자신들의 정책적 자율성이 제한되고 종속되는 위험이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동맹이라고 하는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방기', 즉 버려지는 경험을 당한 북한이다.
북한이 아무리 핵을 보유하고 과거에 비해 전략적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도 이런 한반도 지정학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북한이 중국·러시아와의 밀착관계에서 오는 부담과 위험을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수교로 나갈 유인은 여전한 것이다. 이는 북한 지도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미국을 '최대 위협'으로 규정하는 자체가 북미대화의 수요를 반증한다.
아울러 북한과 미국이 대화 재개에 합의해 북핵 중단에서 시작되는 로드맵에 합의한다고 해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가 명시되지 않는 한 동북아시아에서 그런 합의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북한도 최근 우려하고 있지만 일본 등 역내 핵 확산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북한과 미국은 과거 비핵화 결단에 합의하고서도 시기를 미뤄 기회를 놓친 적이 적지 않다.
지난 2000년 10월 조명록 북한 인민군 차수의 워싱턴 방문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이를 토대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준비됐지만, 이어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부시 후보가 승리함으로써 기회는 무산됐다.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기본 목표를 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이 공동성명의 단계별 이행조치에 합의한 2007년 2.13 합의도 북한의 합의 파기와 미국의 정권 교체가 맞물리면서 폐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김 위원장에게 각종 유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여러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미국내부 정세변화에도 불구하고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지속적으로 보일지 여부는 미국·이란 전쟁의 향배와 함께 북미관계에서 중요 변수가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사심이 많은 지도자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 말고 과연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 이처럼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속적인 유화 제스처에도 북한은 침묵하고 있다. 평양은 숙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 실무접촉으로 가시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김 위원장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