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에서 총지출 규모를 사상 최대인 820조9천억원으로 편성했다. 올해보다 93조원, 12.8% 늘어난 규모로 증가율 역시 역대 최고다.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세수가 큰 폭으로 늘어난 만큼 재정지출도 과감하게 확대해 인공지능(AI)·반도체 등 미래 성장동력에 집중 투자하고 청년·지역·취약계층에 성장의 과실을 확산하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의 지출 확대에도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0.1%까지 낮추고 국가채무비율도 50%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적극재정→경제성장→재정기반 확충'으로 이어지는 성장주도형 재정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게 이번 예산안의 핵심이다.
정부는 1일 국무회의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의 '2027년도 예산안'을 의결했다. 이번 예산안은 이재명 정부가 편성 전 과정을 처음으로 온전히 주관한 첫 본예산이다. 정부는 구조적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 있는 시점에서 적극적인 재정 투자를 통해 잠재성장률을 추세적으로 반등시키는 데 방점을 찍었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사전 브리핑에서 "2027년 예산안은 단순한 내년도 나라살림 계획을 넘어 글로벌 AI 패권 다툼이 가열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나아갈 청사진"이라며 "반도체 호황 등에 따른 소중한 세수를 경제·사회 시스템 전반의 대혁신에 투자해 기존의 틀을 과감하게 넘어서려는 전략적 예산안"이라고 밝혔다.
역대 최대 820.9조…늘어난 93조 중 69조는 기금
내년도 총지출은 820조9천억원으로 올해 본예산 727조9천억원보다 93조원(12.8%) 증가한다. 역대 정부 본예산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로, 종전 최고였던 2009년 10.6%를 넘어섰다.특히 늘어난 93조원의 상당 부분은 기금 지출 증가에서 비롯된다. 예산 지출은 올해 481조4천억원에서 내년 505조원으로 23조7천억원(4.9%) 늘어나는 반면 기금 지출은 246조5천억원에서 315조8천억원으로 69조4천억원(28.2%) 증가한다. 전체 지출 증가분의 약 4분의 3에 해당한다.
정부는 대규모 세수 증가분 일부를 단년도 소비성 지출에 쓰는 대신 미래 성장동력 등에 전략적으로 투자하거나 필요할 때 재정 여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미래대응기금 등 새로운 재정 운용체계를 도입했다.
재정지출을 역대 최대 폭으로 늘리면서 동시에 대규모 지출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모든 재정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재량지출에서 38조6천억원을 줄이고 의무지출 구조개혁을 통해 69조원을 조정하는 등 107조6천억원 규모의 재원을 재배치한다. 재량지출 사업 가운데 2100여개는 폐지된다.
AI·반도체 21.3조…미래 성장엔진에도 62.8조
늘어난 재정은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미래 산업과 청년·지역·취약계층 지원에 집중된다. 정부는 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AIDC) 등 3대 메가프로젝트와 AI 분야에 올해 10조8천억원보다 97.2% 늘어난 21조3천억원을 투입한다.
에너지 대전환을 비롯한 미래 성장엔진 확충에는 올해 51조2천억원보다 22.7% 증가한 62조8천억원을 배정한다. 정부 연구개발(R&D) 예산도 35조5천억원에서 39조5천억원으로 11.2% 늘어난다. 특히 성장과 도약의 씨앗이 될 신규 R&D 사업에는 역대 최대인 3조3천억원을 투자한다.
청년 성장단계별 지원에는 43조3천억원을 투입한다. 교육과 취업·창업, 자산형성, 주거, 혼인·출산에 이르기까지 청년의 생애주기 전반을 지원한다는 구상이다.
지방주도 성장과 소상공인·농어민·취약계층 지원 등 이른바 'K자형 양극화' 대응에는 117조1천억원, 국민 안전과 평화를 위한 투자에는 38조3천억원을 배정했다.
분야별로는 보건·복지·고용이 289조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일반·지방행정은 149조원, 교육은 110조7천억원, 국방은 73조3천억원이다. 증가율로는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가 29.7%로 크게 늘었고 문화·체육·관광도 20.4%, R&D는 11.2% 증가했다.
박 장관은 "생산연령인구 감소와 생산성 정체로 구조적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 있는 갈림길에서 이번 회복의 모멘텀을 잠재성장률의 추세적 반등으로 이어가야 한다"며 "성장의 그늘에 있는 청년, 소상공인 등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의 온기를 전 세대·지역·계층으로 확산하는 K자형 양극화 완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820조 쓰는데 관리수지 3.9%→0.1%…'반도체 세수'가 뒷받침
역대 최대 지출 확대가 가능한 배경에는 반도체 호황에 따른 대규모 세수 증가가 있다. 내년도 정부 총수입은 880조8천억원으로 올해보다 205조6천억원(30.4%) 증가한다.이 가운데 국세수입은 584조4천억원으로 올해 본예산 390조2천억원보다 194조2천억원 늘어날 것으로 정부는 전망했다. 반도체 호황에 따라 법인세와 소득세 등이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 데 따른 것이다. 세외수입도 사회보장성 기금 수입 증가 등에 힘입어 285조원에서 296조4천억원으로 11조4천억원 늘어난다.
수입이 지출보다 훨씬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재정지표도 크게 개선된다. 정부의 실질적인 재정상태를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는 올해 본예산 기준 107조8천억원 적자에서 내년 3조1천억원 적자로 대폭 줄어든다. GDP 대비 적자 비율도 3.9%에서 0.1%로 3.8%포인트 축소된다.
국가채무는 1413조8천억원에서 1519조8천억원으로 늘어나지만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51.6%에서 48.3%로 3.3%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정부는 전망했다. 통합재정수지 역시 올해 52조7천억원 적자에서 내년에는 59조9천억원 흑자로 돌아선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면서도 최근 20년 내 가장 양호한 수준의 관리재정수지를 개선해 경제성장과 재정건전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내년에는 외환위기 당시 투입된 공적자금 상환도 마무리된다. 정부는 2003년부터 내년까지 모두 97조2천억원을 상환하게 된다며 이를 '30년 만의 IMF 위기 극복 완수'라는 상징적 의미로 제시했다.
중장기적으로도 적극재정 기조를 이어간다. 정부는 2026~2030년 총지출 증가율을 종전 중기계획보다 높여 향후 5년간 재정투자 규모를 400조원 이상 확대하되, 2030년까지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GDP 대비 3% 이내, 국가채무비율은 40% 후반대로 관리한다는 계획이다.
박 장관은 "향후 구축해야 할 재정운용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장주도형 재정선순환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지에 있다"며 "과감한 재정투자로 성장의 물꼬를 트고, 그 성장이 다시 재정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적극재정-경제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반드시 안착시키겠다"고 말했다.
확장재정에 한은은 금리 인상…정부 "엇박자 아니다"
다만 정부가 재정지출을 역대 최대 폭으로 확대하는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물가 안정을 위해 통화당국은 금리를 올려 시중 유동성을 줄이는 반면 정부는 지출을 크게 늘리면서 한쪽에서는 감속 페달을, 다른 쪽에서는 가속 페달을 밟는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지출 확대가 현금성 지원이나 단기적인 소비 진작보다 AI·반도체와 R&D, 인프라 등 경제의 공급능력과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투자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청년 지원과 취약계층 보호 역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출인 만큼 중장기적으로 물가 안정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또 내년도 총수입 증가율이 30.4%로 총지출 증가율 12.8%를 크게 웃돌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박 장관은 "2027년 예산안은 재정운용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미래 대비에 담대하게 투자하며 사회변화에 맞지 않는 낡은 구조를 과감하게 개혁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재정 계획"이라며 "국민과 함께 시작한 도약의 발걸음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고 새로운 희망을 여는 출발점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2027년도 예산안을 오는 3일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2026~2030년 국가재정운용계획도 함께 제출하고, 미래대응기금 신설을 위한 관련 입법 절차에도 착수한다.
국회는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거쳐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 헌법상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 2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