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원가의 핵심인 배터리 가격이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낮아졌지만 정작 국내 전기차 가격은 체감할 정도로 내려가지는 않고 있다. 배터리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원가는 저렴해졌지만, 완성차 업체들이 첨단 전장 장비를 대거 탑재하며 고급화한 데다가 설비·인건비 등 생산비를 낮출 구조도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중국 전기차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한국 시장에 빠르게 안착하면서, 국내 업체들은 차량 성능을 유지하면서 비용을 더 낮출 수 있는 차세대 배터리 개발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배터리 가격은 떨어졌는데…국산 전기차 가격은 보합세
8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글로벌 리튬이온 배터리팩 평균 가격은 2021년 킬로와트시(kWh)당 132달러에서 2025년 108달러로 18% 하락했다고 블룸버그 에너지조사기관 블룸버그NEF는 집계했다. 2024년에는 전년보다 20% 떨어졌고, 작년에도 8% 떨어지며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순수전기차(BEV) 전용 팩 가격만 보더라도 2021년 kWh당 118달러에서 2022년 138달러, 2023년 128달러, 2024년 97달러, 2025년 99달러로 집계돼 5년 동안 약 16% 낮아졌다.반면 국내 전기차 가격은 이 기간 동안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 현대차 아이오닉5는 2021년 출시 당시 4695만원에서 현재는 4735만 원부터 시작한다. 2022년 출시 당시 5200만 원부터 시작했던 아이오닉6도 현재 시작가가 4856만 원으로 큰 차이가 없다. 사양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배터리 가격 하락 폭에 비해 차량 가격 변화는 제한적인 상태다.
NCM 배터리보다 저렴한 LFP 배터리를 적용한 차량도 소비자가 체감할 만큼의 가격 변화는 크게 없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지난해 평균 팩 가격은 LFP가 kWh당 81달러, 니켈·망간·코발트(NCM)가 128달러로 LFP가 약 37% 저렴했다. 그러나 LFP 배터리가 탑재된 기아의 '레이 EV'는 2023년 출시 후 가격을 동결했다가 현재 판매가는 소폭 올랐다. KGM의 토레스 EVX는 2023년 사전계약(4850만원) 당시보다 현재 약 200만원 가량 저렴한 수준이다.
중국에 규모·설비·인건비 밀려…고급화도 가격 동결에 한 몫
전문가들은 배터리 가격이 내려가도 국산 전기차 가격이 떨어지기 어려운 이유로 '규모의 경제 부재'와 '차량 고급화'를 꼽는다.예컨대 중국 전기차 기업들은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 대규모 생산에 따른 규모의 경제를 구축한 데다가 최신 생산 설비에 부품 공급망, 저렴한 인건비까지 맞물려 '저렴한 전기차'를 찍어내는 구조를 갖췄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단순히 LFP 배터리를 탑재한 모델을 많이 양산한다고 해서 가격을 인하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글로벌 회계법인 PwC의 자동차 산업 전문 조사기관인 PwC 오토팩츠(Autofacts)가 분석한 '글로벌 전기차 시장 분석 및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전기차(BEV·PHEV)를 약 1600만 대 생산한 것으로 집계됐다. 순수전기차(BEV) 생산량만 보면 2024년 기준 중국은 693만 대, 한국은 42만 대로 차이가 크다.
중국은 생산 물량이 워낙 많아 차량 1대당 들어가는 부품과 설비 고정비를 대폭 낮출 수 있다. 신규 전기차 업체들이 비교적 최신 설비를 갖춘 공장을 대규모로 구축한 것도 국내 업체들과 다른 점이다. 반면 국내 완성차 업계는 기존 내연기관 생산 설비조차 쉽게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 고연차·고임금 인력 구조도 전기차 가격을 동결시키는 요인이다.
이에 대해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한 해 1600만~1900만대 만드는 중국은 이미 규모의 경제가 완성된 데다 최신 설비까지 갖췄다"며 "반면 우리는 이번에 공장 일부를 전환했고, 인력은 연봉 1억 이상의 고연차들이기 때문에 배터리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바로 전기차 가격이 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국내 업체들이 전기차 고급화를 꾀해왔던 것 역시 가격 인하를 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전기차를 중심으로 대형 디스플레이와 카메라·레이더 등 ADAS 장비, 고성능 반도체와 차량용 컴퓨팅 시스템, 통신 및 OTA 기능 등이 기본 옵션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시장 확대 과정에서 차량의 상품성을 높이고 가격을 함께 끌어올린 점이 현재 가격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차세대 배터리 개발이 해답 될까
비싼 NCM 대신 LFP 배터리를 더욱 공격적으로 탑재한다고 하더라도 국내 전기차 가격이 쉽게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이유로는 기술적 문제도 거론된다.
LFP는 소재 단계에서 NCM보다 원가가 50~70%가량 낮지만 에너지밀도가 낮아 같은 수준의 주행거리와 용량을 확보하려면 더 많은 셀과 소재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셀을 모듈과 팩으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NCM과 LFP의 가격 격차가 줄어든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국내 업체들은 성능 저하 없이 원가를 낮출 수 있는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주력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지난달 26일 2026 CEO 인베스터데이에서 내년 출시하는 전기차에 중니켈 NCM을 적용해 배터리 비용을 약 30% 낮추겠다고 밝혔다. 중니켈 NCM은 기존 고니켈 NCM보다 니켈 비중을 낮추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망간의 활용을 높이는 방식으로 원재료 비용을 낮추면서도 LFP보다 높은 에너지밀도를 유지할 수 있다.
LMR(리튬망간리치) 배터리 상용화도 국내 전기차 가격을 인하할 수 있는 요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LMR 배터리는 코발트 사용을 줄이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망간을 활용하면서도 높은 에너지밀도를 확보할 수 있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과 서울대 연구팀은 LMR의 전기차용 대형 셀 상용화의 최대 난제였던 가스 발생 문제를 개선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LG에너지솔루션-서울대, 차세대 LMR배터리 상용화 첫 발)
한양대 권오민 배터리소재 교수는 "LMR 배터리가 상용화 되면 NCM을 사용했을 때보다 (전기차) 가격이 좀 더 저렴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