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억만장자 코인 재벌들이 우익 정당에 7200만 파운드(한화 약 131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후원해 눈길을 끌고 있다.
13일(현지시간) BBC, 가디언 등 외신들에 따르면 암호화폐 투자자 벤 델로와 크리스토퍼 하본이 영국 개혁당(Reform UK)에 각각 3600만 파운드씩 총 7200만 파운드를 후원했다. 이는 영국 정당 후원금 공개 제도가 도입된 2001년 이후 단일 기부액 기준 최대 규모다.
또한 이번 후원으로 개혁당은 올해 모든 정당 중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개혁당은 올해 8600만 파운드(한화 약 1562억 원)가 넘는 기부금을 모금했는데, 이는 보수당이 모금한 1020만 파운드(한화 약 185억 원)와 노동당이 모금한 770만 파운드(한화 약 140억 원)를 훨씬 능가하는 수치다.
두 코인 재벌이 거액을 후원한 배경에는 개혁당이 오는 2029년 8월로 예정된 총선을 통해 정권 교체를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이 존재한다. 개혁당은 영국을 유럽연합 탈퇴(Brexit·브렉시트)의 길로 이끈 핵심 인물인 나이절 패라지가 2018년 만든 브렉시트당이 전신이며, 2021년 개혁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벤 델로는 12일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에서 "기존 정당이 오랫동안 집권해 온 이유 중 하나는 그들에게 도전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개혁당의 최근 (자금적인) 어려움을 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당이 공정한 경쟁을 위해 자금 모금에 시간을 덜 쓰고 정부 구성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고액 기부를 "기득권층에 의해 실망한 수백만 영국 국민을 대신하여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델로는 앞서 1월과 3월에도 개혁당에 400만 파운드를 후원한 바 있다.
하본 역시 12일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에서 "패라지가 이끄는 개혁당만이 경제적 번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라고 했으며, 또 "영국 투자 장벽과 투자 의욕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볼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며 현 정부의 세금 제도와 규제 정책 등에 불만을 드러냈다.
실제로 반(反)이민·감세·반유럽 통합을 내세우며 '영국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패라지 대표는 전 집권당인 보수당과 현 총리를 배출한 노동당을 모두 '무능한 기득권 카르텔'로 규정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에 개혁당은 지난 5월 지방선거(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에서 400석 넘는 지방의회 의석을 추가하며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개혁당은 현 집권당은 노동당에 이어 다음 총선에서 집권당의 자리를 가져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개혁당의 나이절 패라지 대표는 13일 자신의 엑스(X, 구 트위터)에 이번 후원과 관련해 "델로와 하본이 원하는 것은 단지 영국을 바로잡아 줄 정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개혁당이 약속하는 것"이라며 "하본과 델로의 관대한 지원 덕분에 개혁당은 이제 다음 총선에서 공정한 경쟁의 장에서 싸워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망가졌다. 오직 개혁당만이 이를 고칠 역량을 갖췄다"고 주장했다.
외신들은 이번 후원이 자금 의혹으로 최근 몇 달 동안 이뤄진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에 선두 자리를 내준 개혁당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29년 예정된 차기 총선 전에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채널4가 탐사보도 그룹 '버바팀'(Verbatim)과 함께 진행한 위장 취재 결과가 지난 3일 채널4를 통해 보도됐는데, 개혁당은 미국인 기부자와 미국 기업으로 위장한 기자를 만나 기부금을 받으려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영국 선거법상 영국의 등록 유권자 또는 영국에 등록된 기업만 영국 정당에 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로 패라지 대표의 최측근 보좌관인 댄 주크스와 개혁당 정책국장인 제임스 오어는 보도 다음 날 당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패라지 대표는 영국개혁당이 '함정'에 빠진 것일 뿐 당이 위법을 저지른 것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런던경찰청은 지난 9일 공식 성명을 통해 "법 위반 가능성이 있다"며 수사에 착수했다.
이번 개혁당 고액 후원금을 두고 다른 정당 소속 의원들 사이에서는 개인 기부금 상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상한제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부유층이나 기업가의 고액 후원이 민주주의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 고위 기업인은 옵저버와의 인터뷰에서 "대규모 정치 기부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대규모 정치 기부와 부패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부패 척결 운동 단체인 '스포트라이트 온 코럽션'은 12일 성명을 통해 "이처럼 판도를 바꿀 만한 정치 자금 기부는 영국 민주주의에 엄청나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며 "이는 공정한 경쟁의 장이 아니며, 오히려 자금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법이 조작될 위험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기부금 상한선을 설정하지 않기로 한 것은 우리 정치가 미국화될 수 있는 매우 높은 위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